몇년 전, 친구놈이 영화를 추천하면서 '반드시 마흔되기전에 봐야하는 영화' 라는 이유를 댔었다.
30대 중반 쯤, 평범한 회사에서 평범한 일을 하다가 이 영화를 보기라도 하는날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뛰쳐나가고야 말 인간이라는게 그 이유였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건가! 라고 외치며 상사에게 쌍욕을 하고, 회사를 때려치우고, 오토바이를 타고 유라시아대륙을 건널 것 같다는거다. 그러니 사회에서 견고하게 자리잡기 전에, 지금 하고 있는걸 때려치워도 아무도 아쉬워하거나 곤란해지지 않을 때에 미리 이 영화를 보고 그때가서 혹시 있을지 모르는 가족의 생계나 사회적 지위같은 것 들을 안전하게 지키는게 좋겠다는 말도안되는 말과 함께 말이다. '이거 미친놈인가' 생각하면서 전해들었던 영화제목이었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잡지 '라이프'의 사진담당으로 일하며 평생을 지극히 평범히 살아온 주인공이 마지막 호의 표지사진을 잃어버리고, 그 사진을 찾기위해 작가를 찾아 여러나라를 돌아다니며 본의아니게 모험을 하게되는 내용이다. 영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내가 한번도 쉬지않고 끝까지 봤을만큼 매력적이었고,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내용이 기억날 만큼 여운이 강한 영화였다. 무엇보다 친구가 내게 추천했던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영화였다. '팀장님'쯤 되어서 봤다면 분명히 오토바이를 다시 샀을 만 한 영화가 분명했다. 쌍욕은 당연히 참았을거고, 사표도 아마 참았을테고, 어렸을 때 타던 오프로드 바이크 말고 할리데이비슨 같은 걸 샀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말이다.
남들처럼 30년동안 한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고, 친구들을 만나고, 청춘을 지나왔다. 잡지에서 사진을 담당한것도, 본의아니게 모험을 떠나야만 했던 것도 아니지만 말 그대로 '어느 날 갑자기' 동해에 살기로 마음먹었다. 친구는 커녕 아는 사람 하나 없고, 버거킹도 코스트코도 없다. 주변 사람들은 '미친놈'부터 '대단하다'까지 감탄사는 다르지만 소리를 질러댔고, 엄마는 이사한다는 말에 평생 안쓰던 마음이 쓰였는지 쌈짓돈까지 내어주었다. 조용하고 공기좋은, 심지어 그렇게 좋아하는 동해바다 옆으로 간다는데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나름대로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싶은 마음이었는데, 모두에게 그렇게 받아들여질만 한 일은 아니었나보다. 물론 당장 하고있는 일과 오래 알고지낸 사람들과 익숙한 동네를 두고 혼자 멀리 떠나 외로울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었겠지만.
나이먹고 은퇴하면 묵호항 근처에 살고싶다고 농담처럼 말하던 망상같은 일을 실제로 저질러버렸지만, 생각보다 멀쩡한 일상에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로 삶이 평화롭다. 인터넷으로 자동차 부품을 팔고, 하루에 두 번 소설이와 산책을 하고, 매일 한 잔씩 커피를 사먹는 일상이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다. 달라진 점이라면 강아지 산책로가 대전천변에서 망상해변으로, 대흥동 희락반점이 집 앞 하나로마트의 제철생선회로 달라진 정도. 새벽에 시끄러워서 잠 못자는 대신 시끄러울까봐 조심하게 되고 공기가 너무 맑아서 코가 시려운 정도다.
물론 외롭지만 그 외로움이 생각보다 익숙하고, 부족하다고 느껴졌던 많은 것들은 당연히 불편했지만 빠른속도로 적응하는 중이다. 걱정했고, 실제로 나타나기도 했던 문제들은 점점 작아지고, 생각지도 못했던 장점들이 나타나 심지어 점점 커지는 중이다. 본의아니게 삶이 단순해지고, 그로인해 해야 하는 일의 갯수가 줄어들다보니 자연스럽게 내용이 충실해진다. 나를 좀 더 담백하게 바라볼 시간적, 공간적인 여유를 가질 수 있게되면서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의 윤곽이 조금 더 뚜렷해진다. 그저 이사했을 뿐인데. 조금 더 멀쩡히 나이먹고있는 기분이 든다.
아무런 댓가 없이 내 글을 쓰는게 꽤 오랜만이다.
최근 몇 년, 누군가의 부탁을 받거나 원고료를 받아 '써야만하는' 상황이 아니면 아무것도 쓰지 않고 살았다. 동해에 오기 전까지는 그저 게을러서, 코로나니 장사매출이니 되도않는 핑계들을 대며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을 걱정하느라 아무것도 못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물론 그게 80%쯤 맞지만, 나머지 20%를 찾아야 다시 무언갈 시작할 수 있는 상태의 인간이 된다는 것은 몰랐다.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도 시간은 필요했다.
인정하고싶지 않지만, 꽤 지쳐있었던것 같다. 서로 상처받을까봐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게 된 인간관계들과 어딜가도 시끄럽고 산만한 도시생활에. 남보다 못하지만 나이먹었으니 화목한척 해야하나 고민되었던 가족관계에, 남들이 부러워했지만 -그래서 아무한테도 말 못한- 내가 만든 감옥같았던 임대아파트와 오랜 시간동안 아무런 결과도 내어놓지 못한 창작자로서의 나에게.
동해로 이사오고 약 두달정도 식물처럼 숨만쉬고 나서 알게 되었다. 평생을 꺼내 쓸 줄만 알았지, 충전은 커녕 가만히 앉아있어 본 적도 없었다. 고장나지 않는게 이상한 상태의 기계였다. 부품팔아 먹고사는놈이. 멍청하게 지 인생을 엔진블로우 내버렸다.
박차고 일어나 동해에 가서 살기로 했다.
커피머신과 위스키바가 달려있던 사무실과 접근성이 좋고 무려 지하주차장이 달린 아파트, 새벽까지 열려있는 커피가게들과 연비 안좋은 까맣고 커다란 세단까지. 금이야 옥이야 정성껏 끼고살았던 모든 것들을 시원하게 집어던지고, 주변사람들의 큰 걱정을 등에 업고 바닷가 작은 아파트로 이사한 소감은 생각보다 심플하다.
만족스럽다. 편안하다.
이제 겨우 편안해 졌으니, 망가져 바스러진 조각들을 깨끗히 털어내고, 과도한 열에 경화된 생각들을 교환할 시간이 필요하다. 이 글을 쓰는 시간들이 나에게 그 역할을 훌륭히 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억지로 가볍거나 무겁지 않게, 지나치게 즐겁거나 슬프지 않게. 강원도 음식처럼 슴슴하고 정직하게 그 시간들을 보내고 나면, 다시 꽤 오랜시간 쓸 수 있는 상태로 멀쩡히 리빌트되리라 생각한다. 그날의 잘 수리된 나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