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토대지진 101주기에 부쳐
“역사는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파친코>에 나오는 대사다. 왜 상관이 없겠는가마는, 그래도 살아간다는 의지의 표명일 터다. 이 드라마에 특별한?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이 글이 다루려는 간토대지진의 재현이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도쿄에 진도 7.9의 강진이 발생한다. 참사 한복판 오후 3시경부터 “조선인들이 불을 지르고 다닌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탄다”, “조선인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습격한다”등의 유언비어가 출몰한다. 기획한 게 아니고서야 땅이 갈라지고 집이 무너지는 아수라장에 어떻게 이런 급속한 유통이 가능할까.
9월 2일 토교도는 계엄령을 선포한다. 경찰이 “폭도가 있어 방화 약탈을 범하고 있으니 시민들은 당국에 협조해 이것을 진압하도록 힘쓰라”는 게시를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총검으로 무장한 군경과 시민을 가장한 자경단이 조선인을 색출해 살육하기 시작했다. 9월 1일 밤부터 9월 6일까지 6천의 조선인들이 학살당했다.
이때 조선인인지 아닌지를 구별해내기 위해 활용된 것이 ‘15엔 50전’이었다. “주고엔 고주센이라고 해봐”라는 명령에 ‘추코엔 코추센’이라고 발음하면 가차 없이 죽였다. 조선인이 ‘주고엔 고주센’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의 광경을 목격한 일본 청년 쓰보이 시게지는 <15엔 50전>이라는 장시를 남겼다.
간토대지진에 관한 증언 기록은 많지 않다. 이기영의 <두만강>, 구로사와 아키라의 <두꺼비 기름>과 자경단이었던 아쿠다가 류스노케가 당시 상황을 증언한 기록 정도다. 참사 자체가 도쿄 군경에 의해 완벽히 통제되었기 때문이다. 10월 20일이 되어서야 간토 학살에 대한 보도 통제가 풀렸으니 이미 상황을 철저히 은폐하고 종료한 뒤였다.
그때부터 지금껏 일본 정부는 “사실관계를 파악할 기록이 없다”고 주장하며 제대로 된 실태 조사를 벌인 적이 없다. 어쩐 일인지 올해 일본 사이타마현 오노 모토히로 지사가 간토대지진 추도식에 추도문을 보냈다고 한다. 도쿄도 지사가 8년째 추도문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과 대비된다.
김문수의 망언처럼 당시 조선인이 일본 국적이었다면 이런 학살과 책임 회피가 가능한가? 나는 민족주의자나 애국자와 거리가 아주 먼 사람인데도, 이게 도대체 어느 나라 정부 관료들이 지껄이는 말인지 헷갈릴 정도로 기가 차다.
얼마 전 고시엔에서 교토국제학교가 우승하자, 한국어로 울려 퍼지는 교가에 울컥한 나머지 그들의 존재조차 몰랐던 사람들이 자랑스럽다고 울먹이거나, 고작 야구는 위대하다는 말을 하는 한국의 대통령이나, 이들의 궤적을 그저 재일교포의 우승 정도로 뭉뚱그려 자랑스런 한국의 후예 정도로 치부해버리는 보도를 보고 있자면, 낮이 뜨겁다. 잠깐의 찬사보다 저 끔찍한 학살로부터 지금까지 갖은 차별과 혐오를 견디며 살아남아, 여전히 조선 국적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재일조선인’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때의 비극으로부터 101년이 되었다. 일본 정부는 진상 규명에 대한 요구에 꿈쩍도 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일본의 마음’이라는 한국 정부의 속마음을 알고 있는데 움직일 턱이 없다. 얼마 전 오키나와에서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구중회 씨 일가족 학살 사건을 다룬 김숨의 <오키나와 스파이>를 읽고도 마음이 착잡했는데, 간토대지진 101주기를 맞으니 더욱 그렇다. https://brunch.co.kr/@jupra1/260
죽어간 사람들의 공포와 경악 속에서도 얼마나 살고 싶었을까를 생각하면 마음이 저리다. 희생자분들의 안식을 기원한다. 간토대지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지난해 간토대지진 100주기를 맞아 출판된 <백 년 동안의 증언/간토대지진, 혐오와 국가폭력>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