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드라마 <정숙한 세일즈> 리뷰
딸애 초등학생 때였다. 차를 타고 가는 중이었는데, “엄마 성인 용품이 뭐야”라고 물어왔다. 흠... 느닷없이 뭐지? 백미러로 보니 지나던 도로변에 ‘성인 용품’이라는 팻말을 세우고 차에서 뭔가를 팔고 있었다. 당시엔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난감했는데, 지금 딸애가 묻는다면, JTBC 드라마 <정숙한 세일즈>의 주인공처럼 “열정적 성생활”을 돕는 용품이라고 대답하겠다.
드라마는 1992년 지방 소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32세의 초등 1학년 아들을 둔 정숙(김소연)은 돈이 궁하다. 남편이 직장 생활을 진득하니 하지 못해 수입이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경리를 구하는 작은 회사에 면접을 보지만 유부녀라고 퇴짜를 맞는다. 정숙의 말대로 “경리랑 유부녀랑 무슨 상관이겠는가”마는, 지금도 그때도 노동시장은 성 불평등했다. 경제적 위기를 타개할 방법을 고심하던 정숙이 눈이 번쩍 뜨이는 아이템을 찾았으니 바로 성인 용품 방문판매였다.
성인용품 방판을 접할 기회가 있다면 요것조것 구경하고 재미있겠지만, 이는 지금의 성에 개방적인 여성의 호기심일 테고, 90년대 여성, 그것도 젊은 여성이 성을 입에 담거나 관심을 기울이면, 즉시 정숙하지 못한 발라당 까진 여자로 낙인 당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랬다. 당시 성에 대한 정보를 얻는 방법은 미용실에서 ‘레이디 경향’ 등의 잡지를 통해 얻는 게 고작일 정도로 성에 대한 담론이 척박했고 터부시되었다. 이런 사정이었으니 대도시도 아니고 지역 작은 마을에 성인용품 방판이 등장했으니 마을이 발칵 뒤집힐 일이 아니겠는가.
드라마의 시간적 배경인 1992년에 나는 20대 후반이었다. 당시 나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친구들이 결혼한 상태였고 아이를 낳은 친구도 있었다. 결혼하면 성생활이야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당시 내가 미혼이라는 이유로 친구들조차 마치 들으면 안 되는 비사라도 되듯 성 생활에 대해 함구했다. 참 답답한 시절이었다. 당시 남자들이 누린 성적 자유 혹은 방종 (갖은 음담패설과 누가 누구랑 잤네 소문내기 일쑤에 군대 가기 전 총각 딱지를 떼기 위한 성 구매가 무슨 관행이라도 되는 양 떠벌렸다)에 비하면, 여성들은 정숙해야 한다는 가부장의 주문에 철저히 갇혀있었다.
가부장의 주술이 상당히 강력했던 시절, 마치 삿된 마법의 봉인을 찢고 나오기라도 한 듯, 여자들이 성인 용품을 내보이고 설명하는 장면들에서 나는 여러 번 포복절도했다. 모두 기혼인 마을 여자들이 성인 용품을 보고 아예 그 용도를 모르거나 화들짝 놀라거나 하는 장면이 매우 리얼하고 익살스러웠기 때문이다. 신문물에 호기심이 발동하는 건 자연스러운 욕구지만, 마을 유지의 부인은 음란한 도구를 판다고 경찰에 신고까지 한다.
정숙은 사면초가다. 남편의 외도 행각을 눈앞에서 목격하고, 정숙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은 그녀가 성인 용품이나 파는 “역겨운” 짓을 해 남편이 나갔다고 입방아를 찧고, 의지하던 엄마마저 “더럽다”며 딸을 비난한다.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먹고 살길이 막막해 성인 용품을 판 것뿐인데 혐오의 화살이 빗발친다. 자본이나 기술, 학벌 등이 없는 정숙은 무엇으로 생계를 이어가야 사회에서 손가락질을 받지 않을 수 있는가. 그런 것이 있기는 한 건가.
정숙이 직면한 위기는 드라마 주인공들의 조력으로 점차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다. 정숙이 가사도우미를 하던 집의 금희(김성령)는 대학 교육까지 받은 세칭 팔자 좋은 사모님이다. 전업주부인 그녀는 지금껏 자신의 삶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에게 이중 메시지(성녀이면서 요부가 되라는)를 강요받으며 살고 있지만, ‘노라’가 가부장의 집을 부수고 떠나기 위해선 이를 자각할 모멘트가 필요하다.
금희가 정숙을 돕는 것을 안 남편이 고작 이런 여자였냐고 힐난하자, 그녀는 주술에서 깨어나듯 자신의 삶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남편과 가정에 헌신했지만 성인 용품에 관심을 보이고 이로 인한 해프닝에 연루되자, 즉시 아내 자격 없음으로 추락한 보잘것없는 지위가 고작 자신이 행복하다고 붙들고 있었던 삶이 아닌가. 1993년 공지영의 소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가 여성들 사이에서 대 히트를 친 것은 당시 여성을 억압했던 사회적 성 불평등과 무관하지 않다. 이제 각성한 금희는 정숙과 함께 성인용품 방판에 나선다.
영복(김선영) 역시 돈벌이를 하지 않는 남편 때문에 가정 경제가 이만저만 어려운 게 아니다. 고등학생인 딸에게 공부 방 하나 내주지 못하고, 초등학생 아이의 우유 급식비를 주지 못하는 궁색한 살림살이가 한스럽다. 게다 포대기에 업혀있는 어린 아기까지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킬 생각을 하면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옹색한 살림을 필 수단으로 성인 용품 방판이 등장했다면, 사실 하지 않는 게 이상한 일 아닌가.
동네 미장원을 운영하는 주리(이세희)는 건물주의 갑작스런 임대료 대폭 인상으로 곤경에 처한다. ‘미혼모’로 홀로 아들을 키우며 씩씩하게 살아왔지만, 대폭의 임대료 인상이라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선 대책이 필요했다. 성인 용품 방판으로 투잡을 뛰기로 한다. 이렇게 유부녀 4인방의 성인 용품 판매 네트워크가 결성되고 각각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나아간다.
이들의 도전이 마을 사람들, 특히 남자들에게 곱게 보일 리 없다. 마침내 정숙하지 못한 여자를 감시하고 징치하려 든다. 정숙이 세 들어 사는 집에 ‘SEX’라는 낙서를 붉은색으로 대문짝만하게 갈겨놓은 것이다. 지금이야 ‘SEX’라는 말이 금기어가 아니지만,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이 단어는 발화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극 중에서 여자들이 ‘SEX’를 발화하지 못하고 발음을 흘리거나 귓속말로 속삭이는 것은 과장이 아니라, 성을 금기시하던 당시의 시대상을 리얼하게 반영한 것이다.
금지된 성이라는 맥락에서 영화 <거룩한 분노>는 참고할 지점이 있다. 이 영화는 참정권을 쟁취하는 여성들의 투쟁 서사지만, 가부장에 억눌린 성에 대한 담론을 무게 있게 다룬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성에 대한 주도권을 남성이 쥐고 있는 가부장 사회에서 남성들의 전유물을 깨부수지 않는 한 다른 권리도 얻기 힘들기 때문이다.
영화 속 등장인물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들의 성기를 거울로 들여다보고, 성관계의 오르가슴이 남성 주도 삽입 섹스의 허위임을 정확히 깨닫는다. 각성된 자아는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오히려 더 대담한 투쟁의 장으로 나아간다. 자신을 억압하는 남편에게 부부관계에서 한 번도 오르가슴을 느낀 적이 없다고 소리치는 등장인물의 발화가 드라마 <정숙한 세일즈>에서 어떤 버전으로 구현될지 자못 궁금하다.
여성의 성에 대한 욕구와 담론은 은폐되어야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이기만 한 걸까. 제2 페미니즘의 모토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다. 그 가치가 드라마의 주인공들을 통해 멋지게 쟁취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