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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유리 Jan 23. 2024

우리 엄마로 말할 것 같으면

때때로 얄밉지만 사랑스러운.

  딱 한 단어로 엄마를 표현한다면, 어떤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한 단어로는 너무 어렵다. 우리 엄마는 너무나 복잡하고 다채로운 사람이다. 대체로 명랑하지만 언제나 지혜롭고, 때때로 얄밉지만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야무진 것 같지만 깔끔한 편은 아니었고, 언제나 든든한 우리 엄마지만 은근히 손이 많이 가는 타입이었다.      


  스물 세 살 때 나는 엄마와 둘이 유럽 여행을 떠났었다. 네덜란드에서 첫 날, 그 날은 숙소를 나설 때부터 좀 추웠다. 여름이라는 말만 믿고 얇은 옷 밖에 챙겨오지 않아 일단 있는대로 얇은 옷을 겹쳐 입고 숙소를 나섰던 기억이 난다. 반 고흐 미술관 앞에서 줄을 서 있는데, 비가 한 방울씩 떨어졌다. 그러다가 빗줄기가 굵어지고 갑자기 7월의 장마철 마냥 쏟아붓기 시작했다. 팬티까지 쫄딱 젖었지만 줄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고, 비도 마찬가지였다. 


  옆에 딸린 기념품점에서 우산을 팔고 있긴 했는데 하나에 이 만원이 넘어서 살까 말까 망설였다. 나는 하나 사자고 했지만 엄마는 자꾸 돈이 아깝다고 했다. (이후 완벽하게 날씨가 갰기에 나중에는 엄마 말을 듣길 잘했다고 생각했지만 당시에는 ‘그거 얼마 한다고, 하나 좀 사지.’ 싶었다.) 빗줄기가 굵어지며 우산을 살 사람들은 모두 샀고, 이후 그 긴긴 줄에서 동양인 여자 둘만 우산도 없이 비를 쫄딱 맞고 있었다.     


  오들오들 떨고 있는 우리가 춥고 불쌍하게 느껴지던 중, 엄마가 나에게 저 쪽 건물 밑으로 가서 비를 피하고 있으라고 했다. 줄은 엄마가 서 있겠다고. 나는 ‘안된다고, 우리는 하나라고, 엄마를 두고 갈 순 없어.’ 했다. 그랬더니 엄마가 ‘그래? 그럼 내가 갈게.’ 했다. 참나. 나보고 혼자 서있으라고?


  엄마는 이런 사람이다. 때때로 얄밉지만 정말이지 사랑스러웠다.      


  지금에서 유럽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떠올려보면, 어김없이 반 고흐 미술관 앞이다. 굵은 빗줄기에 팬티까지 다 젖은 채로 줄을 서 있던 그 순간. 이후 날씨가 완벽하게 개어 주먹만 한 쥐가 뛰어다니는 잔디밭에 앉아 햇볕을 쬐며 팬티까지 바싹 말렸다지. 인생이 좀 고단해도 되는 이유인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꼽으라 하면 몽마르뜨 언덕에서 듣던 바이올린 연주도, 벨기에 광장에 앉아 와플을 먹던 순간도 아닌 비에 쫄딱 젖은 네덜란드의 추억을 떠올리는 것을 보니 말이다. 


마침내 뒤돌아보았을 때 가장 오랫동안, 또 아름답게 기억에 남는 순간은 고난의 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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