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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유리 Oct 14. 2024

아빠의 폭력

  아빠는 아직도 그 고약한 손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나이를 먹어서 조금 유순해지긴 했지만 본래 유순하게 태어난 사람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딸년 결혼 준비가 제 뜻대로 되지 않자 주먹으로 뺨을 세 차례 올려붙이고는 일주일 뒤에 머쓱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얼굴은 괜찮냐고 물어보는 아빠. 60이 다 되어가는데도 풍채가 얼마나 좋은지 소리를 지르면 집이 떠나갈 듯 화통이 크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울대, 화기로 주체할 수 없이 달아오른 얼굴 근육과 움찔거리는 입술, 고함 소리, 내 얼굴을 가격하는 주먹, 나는 한동안 그런 것들이 생각나 잠을 설쳤다. ㅡ오해할까 덧붙이자면 술을 먹고 때리는 건 아니다. 아빠는 술을 잘 안먹는다. 술은 먹어도 딱 반 병, 취한 모습은 내 평생 본 적이 없다. 지독히도 자기관리가 철저한 사람인데, 아주 깨끗한 제 정신으로 폭력을 휘두른다.ㅡ 고등학생 이후로 출가 외인이 되어 살았으니, 이런 일이 잦지는 않다. 이번은 아마도 4년 혹은 5년만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빠의 폭력은 내게 기억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이었다.


  엄마가 아빠의 외도 이야기로 책까지 출판할 뻔 하게 되었을 때, 그 때까지도 활짝 꺼내놓고 보이지 않은 사실이 있었으니 아빠의 폭력이었다. 그거까지 썼다간 당신 인생이 너무 기구절창해 보이지 않을까 걱정을 했었다. 나도 어느 정도 동의했다. 그래서 나도 여지껏 아빠의 폭력 이야기는 한 적이 없다. 그러나 오늘은, 이제는 ㅡ어둡고 아프지만ㅡ 되먹지 못 한 아빠의 손버릇 이야기를 해보려한다. 왜 이 이야기를 하고자 마음을 먹었느냐 묻는다면, 아시아 여성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님의 <채식주의자>를 읽은 것이 계기였다 대답하고싶다.


  한강 작가님은 본래 폭력에 너무나 취약해 영화에서 싸우고, 때리는 장면을 보면 사흘씩 구토를 하셨다고 했다. 폭력에 지독히 약한 그 점을 극복하고자 폭력에 직면하는 <채식주의자>를 쓰게 되셨다고. 그러면 나도 그렇게 해봐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아빠의 폭력이 소름끼치게 싫고, 혐오스럽지만 내가 그것을 직면했을 때, 나는 한 계단 올라설 수 있지 않을까?


  본래 어떠한 문제가 있으면 세 걸음 정도 물러서서 ‘분석’했을 때, 보다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해진다. 폭력과 외도. 남편으로서 할 수 있는 악행이라는 악행은 최선을 다 해 저지른 아빠. 나는 바로 그런 남자가 가진 폭력의 원인을 가부장적 제도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부인과 자식 때리는 아빠 이야기? 결코 희귀하지 않다. ‘매 맞는 아내’ 이야기는 지금 드라마를 틀어도 나온다. 드라마라는 것이 무엇인가? 민중과 대중들의 공감을 얻어 이익을 보는 매체가 아닌가? 그들이 생각해도 흔하고 흔해 발에 채이게 많기에 ‘폭력적인 남성’의 캐릭터는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빠 ㅡ이하 남자라고도 하겠다.ㅡ도 눈이 있고 머리가 있기에 대충 보고 ‘때려도 되겠다’ 싶은 사람을 판단하고 때린다. 키가 190이 되고 체격이 우락부락한 남성이 난데없이 달려와 아빠 얼굴에 침을 뱉는다 한들, 아빠는 반격할 수 있을까? 아빠의 두 손과 두 발은 얌전히 제 자리를 지킬것이다. 물리적으로, 아주 일차원적으로 그렇다. 그러면 여자라고 힘이 약하니 무조건 다 때리냐? 그건 아니다. ㅡ그럴 일은 없겠지만ㅡ 경찰서장 급 여자 고위 공무원이 아빠에게 와서 모욕적인 욕설을 하며 얼굴에 침을 뱉는다 해도, 아빠의 속은 분기로 타들어갈지언정, 두 손과 두 발은 얌전히  제 자리를 지킬것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때릴 만 하니 때리는 것이며, 그 말인 즉슨 나와 엄마는 ‘때릴 만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무엇이 아빠를 딸과 아내 정도는 ‘때릴 만한’ 사람으로 여기게 만들었을까? 아마도 올바른 가정 교육, 올바른 공교육, 올바른 사회적 교육, 이 중 하나는 틀림없이 결여되었을 것이다. 종가집 종손, 9대 장남으로 태어나 달이라도 따줄 것 처럼 손자를 키웠던 나의 증조부, 그리고 할머니. 장남을 위해 학업을 포기하고 공장에서 일을 해서 동생 학비를 댔던 여자 형제들, 그렇게 자란 남자를 스물 두살에 만나 때리면 맞아주고 홍씨 성을 붙인 아이까지 낳아주었던 우리 엄마. 동창과 불륜을 저질렀을 때도 ‘남자가 사회 생활 하다 보면 한 눈 팔 수도 있는거다’ 하며 이혼을 말렸던 할머니. 온 가족이, 온 사회가 그 남자를 그렇게 만들었다. 딸과 아내 쯤은 때려도 되는 것으로 여길 수 밖에 없이 살아오게 만들었다. 까짓거 화가 나면 살림살이를 내동댕이 치고 밥상을 엎어도 되는, 분이 쌓이는 족족 주먹으로, 욕설로 풀어도 며칠 뒤 머쓱하게 ‘미안하다’는 한 마디면 해결된다고 믿는, 그런 사람으로 만들었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남자의 고함과 폭력에 두려움을 느끼며 살고 싶지 않다. 언젠가 내가 신이 되어 이 세상의 죄악과 수치를 벌하게 된다면, 나는 제일 먼저 폭력을 단죄하고싶다. 곱씹고 곱씹어봤자 이번 생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아보인다. 아빠는 그저 나에게 아빠고, 맞은 뺨은 이미 맞은 거다. 알고는 이어지만 새삼스레, 나는 참 상처가 많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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