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남이의 이야기
김순남은 나의 이명(異名)입니다. 언제부터 불렸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태어나서부터가 아닌가 싶습니다. 내가 순남이란 이름이 나를 지칭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가 네댓 살 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그 이름은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면서, 주민증에 올려져 있는 이름으로 불리면서부터 차차 잊혀 갔습니다. 그래도 가끔씩 먼 곳에 사는 친척이 놀러 와서 나를 보면 “순남이가 이렇게 컸네.”라고 했습니다. 그때서야 왜 내가 순남이지? 엄마에게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내가 태어나서부터 잘 울지도 않고 너무 조용했다고 합니다. 하루 종일 눕혀 놓고 일을 해도 우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너무 순해서 보는 사람마다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는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그러다 중학교 때쯤 문득 순녀면 순녀지 왜 순남이야?라고 생각했었던 적이 딱 한 번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후에는 그 이름으로 불린 적이 없으니 더 이상 생각할 일도 없었습니다.
지금에야 생각합니다. 모두가 순남이라 불렀을 때, 아무도 그 이름에 입을 댄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그 시대의 상황이었다고. 굳이 남존여비 사상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아니더라도 그 당시 사회에서는 아들이, 남자가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나의 부모 세대는 전쟁을 겪은 세대입니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세계 제2차 대전, 그리고 6.25. 수많은 이 땅의 남정네가 전쟁터에 나가 생명을 잃었습니다. 전쟁터로 나간 남정네 대신 여자들이 가정을 지켜야만 했던 시대였습니다. 당연히 아들을 필요로 했습니다. 아들을 낳으면 대접받으며 산후조리를 할 수 있었지만, 딸을 낳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툭툭 털고 나와 일을 해야만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당시 아들은 재산이었습니다. 딸은 애물단지였습니다. 딸만 내리 셋을 낳으면 보따리 싸서 친정으로 내몰림을 당해야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아니면 윗대 시어른에게, 남편의 일가에게 고개를 못 드는 죄인으로 지내야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니 모든 부모의 자식은 아들이어야 했습니다. 딸인 내가 자연스레 순남이란 이름으로 칭해졌다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그런 시대였습니다.
70살 순남이가 초등학교 때는 먹거리가 항상 부족했습니다. 각 가정에서는 밀가루, 강냉이가루, 보리쌀을 배급받기도 했습니다. 학교에서도 미군이 원조해주는 강냉이가루로 죽을 쑤어서 아동에게 점심 급식을 하기도 했고, 우유를 쪄서 급식으로 대신 나누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열악한 환경의 아이들에게 배당되었는데, 그것을 받아먹기 위해서 선생님에게 와이로(뇌물)를 주어야 하기도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얀 쌀밥을 배불리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때였습니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방학 숙제에 쥐를 잡아 쥐꼬리 잘라 말려 오기도 있었습니다. 쥐꼬리를 많이 가져갈수록 숙제 점수는 높았습니다. 집집마다 쥐가 득시글거렸고, 머리와 옷에는 하얀 이가, 집 안 구석구석에는 빈대가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봄날에는 모두 햇볕에 나와 이를 잡았습니다. 이런 시절이 1950년에 여자아이로 태어난 순남이와 부모님의 시대였습니다.
그래도 1950년생 순남이의 시간은 1953년 7월 27일 북한과의 정전 협정으로 실질적으로 총칼을 들고 싸우러 나가는 전쟁의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휴전이란 말은 종전의 의미와는 다르지만, 일단 쉰다는 뜻입니다. 그 쉬는 시간이 67년이 지속되었고, 그사이 내가 사는 대한민국은 많이도 변했습니다.
1950년생 순남이의 시간이 70년이 지났습니다. 흐르는 시간에 비례해서 상황은 너무도 급속히 변해 갔습니다. 그사이에 내가 TV에서 본 대통령만도 열 두 사람이나 되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열 두 사람 중에 온전히 대통령의 임무를 다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와서 수명을 다하신 분은 두 분뿐입니다. 그분들도 백 퍼센트 온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 아들들이 구속되어 실형을 받았으니까요. 참 격동의 시간이었습니다. 그 격동의 시간만큼 세상도 빨리 변해갔습니다.
지금은 쌀이 있어도 건강에 좋지 않다 하며 하얀 밥은 피하려 합니다. 아이들은 예쁘다며 쥣과에 해당하는 햄스터를 집에서 기르기도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아들 아들 하던 시대가 어느 순간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란 구호로 바뀌더니 곧이어 ‘둘도 많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란 구호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다 급기야 아들보다 딸이 더 좋다가 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더는 남정네들이 총 칼 들고 목숨을 담보로 전쟁터로 나가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란 것입니다.
전쟁을 겪은 부모 세대와 전쟁을 겪지 않은 부모 세대의 자식에 대한 생각도 교육 방법도 당연히 다릅니다. 아들이라면 조상의 핏줄을 이어 줄 사람, 큰일을 해야 할 사람, 강하고 귀하게 키워야 했습니다. 부엌일 같은 것은 전혀 아닙니다. 당연히 여자에게 대접받는 사람으로, 군림하는 사람으로 키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남녀평등입니다. 오히려 남의 여자를 데려와 가정을 이루고 난 후에는 부모를 데면데면하는 아들보다, 남의 남자를 데려와 가정을 이루고 부모의 마음을 알뜰살뜰 챙겨주는 딸이 더 좋은 시대가 왔습니다. 앞서간 조상보다 지금 숨 쉬고 있는 인물이 더 소중합니다. 지금은 부모나 자식이나 핏줄에 대한 절대적인 애정보다 개인의 일신을 위한 개인주의로 바뀌어 가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미혼의 시간이 길어지고, 결혼이 늦어집니다. 결혼을 해도 자식들에게 자신의 시간을 할애하고 싶지 않고, 오직 둘만의 사랑으로 좋다는 젊은 부부들도 많아졌습니다. 돌싱, 혼술, 혼밥이라는 신조어가 생겨 일상의 언어처럼 사용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혼술, 혼밥은 젊은이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노년에게도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자녀들이 부모와 함께 살려하지 않고, 또 부모도 자식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립하려는 성향이 짙어졌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나 노인이나 혼자는 외롭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자리에는 외로움을 함께 해 줄 강아지, 고양이가 대신합니다. 언제부턴가 그들은 그냥 동물이 아닙니다. 애완견이란 칭호를 넘어 동반 견이란 이름으로 불립니다. 예전에 주인이 먹던 음식 몇 조각을 땅에 떨어뜨리면 앉아서 받아먹던 위치가 아닙니다. 예쁘고 앙증맞은 자태를 뽐내는 견공(犬公)과 묘공(猫公)은 예쁜 의상까지 차려입고 자신의 사이즈에 맞는 의자에 앉습니다. 머리에는 리본이, 상의에는 티셔츠가, 아래에는 반바지, 또는 예쁜 치마도 걸칩니다. 어리고 약한 친구는 주인의 품 안에 꼭 안기어, 주인이 발라주는 음식을 받아먹기도 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예뻐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참 세상이 바뀌어도 너무 많이, 빨리도 바뀌었습니다.
아침, 저녁 산책길에 네댓 사람을 만나면 한 사람은 그런 친구와 함께입니다. 문득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만약에 내가 앞으로 30년을 더 살아 백 살이 된다면 말입니다. 그때는 어떤 상황이 되어있을까? 아이고 징그러워라, 백 살까지 살려고? 할지 모르겠지만, 만약입니다. 그 만약이 지금 진행 중이니까 가능성이 있습니다. 30년 후는 세상이 어떻게 변해 있을까요?
70살 순남이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는 한 반에 60명씩 하고도 교실이 모자라 오전 반, 오후 반 하여 2교시 수업을 한 적도 있습니다. 전쟁 후라 많은 건물이 파괴된 뒤여서 학교 자체가 모자라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지금의 현상은 심각합니다. 클래스에 많아야 20 ~25명 정도라고 합니다. 이런 추세로 나가면 30년 후에는 10명도 안 될 확률이 있지 않을까요? 혹시라도 그 자리에 예쁘고 영민한 강아지와 고양이가 앉아서 공부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사람의 아이들과 말입니다. 아, 언어가 달라서 안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면 사람의 아이들이 강아지와 고양이의 언어를 배우면 되겠습니다. 그러면 새로운 산업이 육성되겠습니다. 견 어학원, 묘 어학원 등으로 말입니다. 훗, 내가 너무 앞서 나갔나요? 이 책은 이렇듯 머릿속에 4차원의 세계를 가진 70살 순남이가 1950년 때부터 살아온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