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생일은 8월 15일

by 칠십 살 김순남

8월 15일은 내 생일이다. 그 당시에는 모두 음력을 사용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날이 광복된 날이라 좋은 날이라며 양력으로 주민증에 올려주셨다. 그래서 내 생일은 그 당시에 드물게 양력으로 8월 15일, 생일상을 받았다.


8월 15일이란 날짜는 커다란 사건들이 많이 기록된 날이다. 1945년 8월 15일은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으로, 36년간의 식민지 생활에서 해방된 날이다. 그러나 단지 해방이지 광복은 아니었다. 아무튼 좋은 날이다. 3년 후 1948년 8월 15일, 비로소 대한민국은 주권을 가진 대한민국으로 태어났다. 8월 15일은 해방과 광복의 날이다. 정말 좋은 날이다.


그러나 2년 후, 국가가 아직 정비되기도 전, 1950년 6월 25일 북한 놈들이 쳐들어 내려왔다. 그것도 아주 야비하게 일요일, 모두가 휴식을 취하는 조용한 새벽에 말이다. 6. 25 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종전 협약으로 휴전에 들어갔다. 그 두 달 후에 김순남이가 태어났다. 좋은 날일까? 아닐까? 나는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안다. 나를 뱃속에 넣고 두 달간 피난살이를 해야만 했던 엄마의 힘듦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말이다. 너무나 다행스럽게 엄마는 무사히 서울에서 부산으로 피난을 왔고, 부산에서 날 낳았다. 이것은 좋은 일이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났다. 내 나이 25살 때이다. 나는 그때 ‘서이 상사’라고 하는 작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서이 상사는 부관페리와 공항에 면세매점을 운영하고 있는 회사였다. 나는 일본어만 아주 조금 할 수 있었기에 여러 승객이 오가는 공항 근무는 어려워 ‘부산 부관페리 내 면세점‘에서 일했다. 그 당시에는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운행하는 부관페리의 고객은 주로 일본인이었고,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보따리 장사‘를 하시는 한국분들이 많았다. 한국의 좋은 물건들을 본인이 가지고 갈 수 있을 만큼만 보따리에 사서 머리에 이고 손에 들고 일본으로 가지고 가서, 역으로 일본에서도 그런 물건들을 그만큼 들고 한국으로 들어오는 영세 상인들이었다.


그 당시 초라한 면세매점이었지만 로렉스 시계도, 몽블랑 만년필도 판매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 달에 하나 팔면 잘 팔리는 시절이었다. 당연히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토산품이다. 인삼, 인삼차, 인삼 술, 인삼 담배도 있었다. 어쩌다 일본 단체 관광객이 오면, 싹 쓸어갔다. 쇼케이스에 진열된 상품마저도 싹 쓸어가기도 했다.


아, 지금 내가 이야기하자는 것은 이런 인삼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시절이었다는 것이다. 지금 부관 페리는 하마유(Hamayuu)호와 성희호(Seonghee) 두 편으로 매일 운행하고 있고, 그 외의 배들도 출항하고 있지만, 그 시절에는 일주일 세 번 운행하는 페리호 하나였다.


그날은 8월 15일, 내 생일이었다. 국경일이라 관공서, 학교 등 모두 휴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휴일에 앞서 배 출항이 있을 시에는 근무해야 한다. 배 출항은 저녁이었고, 면세매점이 문을 여는 시간은 세관 직원과 법무부 직원이 나와서 출국 절차를 밟을 때이다.


느긋하게 사무실에서 점심을 먹고 후식으로 크래커, 맛동산 같은 주전부리와 커피로 서너 명의 직원이 모여 생일 축하를 하던 중이었다. 라디오에서 광복절 기념식 행사를 중계하고 있었다. 재잘거리며 주전부리를 먹던 우리들 귀에 스쳐 지나가던 아나운서의 말을 한 직원이 들었다. “육영수 여사가 총 맞았대!!” 귀를 의심했다. 몇 번의 반복 뉴스를 듣고서야 놀래서 서둘러 매장으로 나갔다. 경악할 사건이었다.


부관페리 대기실은 벌써 웅성웅성하고 있었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며 대형 스크린이 곳곳에 설치된 그런 시대가 아니었다. 도대체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조차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래도 시간이 되자 출국 심사는 진행이 되고, 심사를 마친 손님은 서둘러 선박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조금 후였다. 먼저 배에 탄 손님들이 모두 하선했다. 어디에선가 출국을 일단 보류하라는 말이 전달되었다고 한다. 손님들은 불안하고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범인이 문세광이란 사람인데 일본 국적을 가진 인물이라고 했다. 현장에서 전해 들은 말일뿐 그때까지 내가, 아니 그 자리에 있던 어떤 사람도 확실한 것은 몰랐을 것이다. 그날, 승객들에게 최종적으로 출국 금지가 떨어졌고 그들은 대합실에서 다음 전달 사항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내 기억으로는 다행히 그날 여객 손님이 많지 않았다.


면세점은 세관 검색이 시작되는 시간부터 오픈되었다가 손님이 모두 승선하면 출항 시간과는 관계없이 문을 닫았다. 우리도 매점 문을 닫고 대합실로 가서 그들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한 사람이 중앙으로 나서더니 일본어로 크게 외쳤다. “일본인 다 모이세요.” 어두운 표정으로 여기저기 흩어 앉아 있던 일본인들이 그 한 마디에 모두 벌떡 일어나 모였다. 먼저 외치던 사람이 말했다. “무슨 영문인지 우리가 직접 알아봐야 한다. 영사관으로 가 보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대표를 뽑자. 나서 줄 사람 있는가?” 그 한마디에 즉각 한 사람이 손을 번쩍 들더니 자신의 직장과 이름을 댄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바로 한 사람이 선출된 것이다. 이어 또 한 사람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 역시 어디 사는 누구라며 이름을 대었다. 또 박수가 터져 나왔다. 또 이어 한 사람이 나섰다. 그렇게 자진해서 세 사람이 손을 번쩍 들고 나섰고,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세 사람의 대표가 선출되었다. “세 사람이 영사관에 다녀올 때까지 모두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마시오.” 그렇게 하고 세 사람은 떠났다.


소름이 끼쳤다. 아주 조용하고 간결한 행위였지만 그 짧은 순간, 그들의 일사불란한 행동은 나에게 충격적이었다. 어느 한 사람 토를 달고 반대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내가 하겠노라 자진해서 번쩍 손을 든 사람도, 짤막한 본인들의 소개에도 아무도 입을 대지 않았고 그들을 대표로 인정했다. 2년 정도 면세매점에서 일본인들을 만나 비교적 익숙했지만 그 순간 그들은 너무 낯설었다. 그 장면을, 그 느낌을, 그 후에 나는 여러 사람에게 이야기했었다. 지금도 그 장면을 기억하고 있다. 그 후는 모른다. 그렇게 좀 더 그곳에 앉아 있다가 돌아왔기 때문이다. 출항 시간은 지금처럼 밤늦은 시간이라, 그날 금지 조치가 풀려서 배가 출항했는지, 아니면 다음 날까지 기다렸다 출항했는지는 지금 기억에 없다. 단, 그 장면이 너무 강렬해서 현재까지도 기억에 남아있다. 일본인의 근성, 속성을 엿보게 되어서일까? 무서운 국민성임에는 틀림없다.


그 후, 여러 추측 후에 문세광은 23세의 조총련계 재일교포로 알려졌다. 원래는 박정희 대통령 암살이 우선이었으나 실패하고 육영수 여사가 총을 맞고 쓰러져 8.15 경축행사가 열린 국립극장 무대 위에서 사람들에게 안기어 나왔다. 그런 후 몇 시간 후에 숨을 거두셨다고 한다. 그 현장이, 그 상황이 오래도록 TV 속에서 재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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