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는 두 세상에서 살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두 세상을 왔다 갔다 한다. 한 세상은 지금 땅에 발을 딛고 걸으면서 보고 있고, 또 한 세상은 내 손바닥 안에 들어있는 작은 물건 속의 세상이다. 처음에 이런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냥 장난감인 줄 알았다. 세상 여행을 하다 보니 지루해서 만들어낸 게임 같은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다. 게임 같은 게 절대 아니다. 그냥 세상이었다. 지금 내가 두 발로 걸어 여행을 하고 있는 세상과 같은 세상이 내 손 안의 작은 장난감 같은 속에 있다. 옛말대로 정말 세상은 요지경 속이다. 나 같이 세상 여행을 시작한 지 오래된 사람은, 그 새로운 장난감 같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려웠다. 어떻게 들어가서 그곳을 또 여행할 수 있는지 알아내느라 끙끙거렸다. 그런데 지금 세상여행을 하러 나온족들은 나오자마자 두 세상을 함께 자유롭게 왕래한다. 누가 그 세상으로 들어가는 길을 가르쳐주지 않아도, 세상 여행 나오기 전에 좁은 통로 안에서 이미 다 배우고 나오는 듯, 스스럼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두 세상을 들락날락하며 새로운 동행을 만난다.
그 세상과 이 세상이 다른 것은 딱 하나 있다. 이 세상은, 어느 여인의 배 안 속에 있는 좁은 통로를 통해 나오면서 비명을 질러대는 것으로 신고식을 해야 하는 것이라면, 장난감같이 생긴 세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비명을 질러대는 신고는 하지 않아도 된다. 단, 자신을 증명하기는 해야 한다. 자신이 이 세상을 여행하고 있는데, 그쪽 세상도 여행하고 싶다는 징표로 자신이 이 세상 여행 중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출입증을 제시해야 한다. 그 하나가 다르다.
그 세상은 이 세상보다 더 넓고 광활하고 화려하고 자유롭다.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가 보기 힘든 곳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내 영역 밖의 모르는 세상도 볼 수 있다. 참으로 멋진 세상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이 하나 더 생겼으니 당연히 더 많은 세상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세상이 좋은 것은, 이 세상에서는 새로운 동행을 만나려면 직접 얼굴을 봐야 되는데 그 세상에서는 직접 얼굴을 보지 않아도 동행이 될 수 있다. 내 얼굴을 보여 주지 않고도 마음 맞는 동행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다른 동행인들의 흉도 볼 수 있다.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끼리,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듯이 할 수 있다. 먹을거리나 간식거리가 필요하거나, 의복이 필요할 때도, 예전에 나는 발품을 팔아서 가게마다 다니며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고, 흥정을 하고 샀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발품을 팔 필요가 없다. 그냥 눈으로 보고 사면 된다. 흥정도 필요 없다. 그냥 가격표가 붙어 있다. 파는 쪽에서 인심을 쓰고 싶으면 하나 사는 가격에 하나를 더 얹어서 주겠다고 표시를 해 놓았기에, 그것에 마음이 가면 그것을 사면 된다.
그럼 돈은 어떻게 하냐고? 종이처럼 생긴, 이 세상에서 사용하는 돈은 필요치 않다. 그냥 자신이 가지고 있는 출입증을 제시할 때 필요한 것을 여기에도 제시하면 된다. 그 출입증은 대부분 암호처럼 숫자와 문자를 입력하면 된다.
내가 이 세상에 나오면서부터 알게 된 엄청난 위력, 세상을 지배하는 위력의 화폐, 즉 종이로 된 돈은 이제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장난감 기계 속의 세상에서는 필요치 않다. 종이로 된 돈으로는 물건을 못 산다. 오직 숫자와 문자만으로 가능하다. 우습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 것은, 문자와 숫자를 모르는 족들을 위해서 그냥 사진만 찍어도 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가게에서 내놓은 이상한 암호 같은 그림을 보여주면서 자신이 지금 들어올 때 이용했던 장난감 기계 같은 것으로 갖다 대기만 해도 물건을 살 수 있게 한 것이다.
이제는 여행 가방에, 여행할 때 필요한 돈을 넣고 다닐 필요가 없게도 되었다. 돈을 대신할 수 있는 숫자와 문자가 찍혀있는 작은 보안카드만 들고 다니면 된다.
세상 여행이 자꾸 쉬워지는 듯, 편해지는 듯, 또 한편으로 자꾸 어려워지는 듯, 피곤해지는 듯, 눈도 마음도 팽팽 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