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칠십 살 김순남 Mar 30. 2024

이상한 세상, 엉뚱한 상상

세상 여행을 시작하고 20여년 동안은 세상은 온통 흑과 백색 뿐이었다. 집의 문패도, 가게의 간판도  TV속에도 검은색과 흰색뿐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것들에 색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단순한 색들이었다. 알록 달록 변해가는 색들이 생경스럽고 예쁘고 신기하고 좋기만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단순한 색들이 총 천연색으로 변했다. 더 많은 시간이 흐르자 오만가지 현란한 색들이 덧칠을 해 댔다. 이제는 더이상 흥미롭고 예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피로했다. 현란한 색채감이 주는 피로감이 대단했다. 때로는 그 현란함이 싫어서 눈을 감고 걷기도 한다.      


흑과 백, 딱 둘뿐이던 색일 때 빨강, 노랑, 파랑이 슬쩍 들어와 자태를 뽐낼 때, 그 빛남이 얼마나 황홀하고 좋던지 불나방처럼 그 색들을 쫓아다녔다. 쫓아다니는 불나방이 많으니 색들은 더 자신감있게 자신을 드러내고 만들어 내었다. 이제는 그 현란한 색들을 피해서 도망치고 싶다. 그러나 도망치면 도망칠수록 현란함은 더 집요하게 따라붙는다. 어쩔수 없다. 도망칠 수 없다면 잡혀야 한다. 도망만이 능사가 아니다. 때로는 잡혀서 굴복하고 순응하는 것도 필요하다. 세상 여행길에 지치지 않으려면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함께 해야한다.      


바뀐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무엇무엇이라고 찝어서 말할 수 없을 만큼 많다. 그중에서 유독 도드라지게 바뀐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형태의 동행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들은 전에는 저만치 떨어져 우리 뒤를 따라다니던 동행이었다. 길 위에서 때로는 사납게, 때로는 빌빌거리며, 때로는 막무가내로, 아무곳에서나 먹고, 싸고 하던, 길 위에서 쓰레기 봉투를 찢고 냄새나는 음식들을 찾아 헤매며 인간의 발소리에 놀래 어둠으로 소리없이 사라지던 네 발 동행들이었다.   

   

그들이 이제는 어엿이 우리들의 아늑한 공간, 거실이며, 주방이며, 심지어 침대까지 점령했다는 것이다. 점령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지배하는 위치에 군림하게 되었다. 우리의 어린 동행인이 세상 여행을 나왔을 때 필요했던 유모차도 그들과 나눠 타야하고, 어린 동행인이 없는 곳에서는 그들만의 차지, 아니 그들을 위해서 마련해 둔다. 네 발로 다니는 동행들은 스스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해 갔다. 그들이 우리에게 어떤 존재감으로 존재하는지. 그들은 그것을 누리는 듯, 여기저기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우리를 향해 소리 내고 짖어댄다. 그들을 동행으로 받아들인 두 발 동물은 비위를 맞추느라 여념이 없다.      


이제 그들은 어엿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아니, 두 발 짐승들이 그들에게 목소리를 내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인간이 누리는 의료보험 혜택이며, 호텔 숙박도 로비도 그들만의 공간을 만들어 내려 한다. 네발 짐승 스스로가 그렇게 하겠노라 나서는 것이 아니라, 두발 짐승들이 그들도 우리와 같은 존재이며 우리와 같은 대접을 받으며 세상 여행을 할 권리가 있다고 그들을 옹호하고 보호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더 나아가 보호 차원이 아닌 모심의 차원으로까지 받들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주장이 틀렸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네발 짐승도 두발 짐승과 같이 세상 여행을 위해 어떤 형태로든 세상 길에 나선 존재들이다. 종의 기원이란 엄청난 책을 쓴 다윈이란 분의 말씀처럼 그동안 우주에서 특별한 존재로 여겨져 온 두 발 달린 짐승도, 특별히 거룩하게 창조된 존재가 아니며 모든 생물계에 적용되는 자연선택의 원리에 의해 현재의 모습으로 진화한 것이라 한다면, 네발 짐승도 자연의 변화에 따라, 지금처럼 보호되어 스스로 먹이를 구하기 위해 땅을 기고, 어두운 숲을 헤매어야 할 필요가 없어진다면 네 발이 필요 없어져 점점 퇴화하여 두발 짐승이 될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문득 두려울 때가 있다. 좀 더 시간이 지나 그들의 위치가 더욱 공고해지고, 더 많은 번식으로 두 발 짐승보다 더 큰 집단을 만들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이다. 집단은 세력을 확장하고 권력을 쥐고자 하는 본성이 있다. 그 집단은 어쩌면 네발당이라는 엄청단 당을 만들어 정치권 안으로 들어와 두발당과 맞서려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국가가 네발당에게 전복당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내가 세상 여행을 나와 오랫동안 지내는 이곳에 최고 지도자가 네발당에서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은 섬뜩한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세상은 계속 진화되고 변화되어가서 그 끝이 어딘지 도저히 갸름할 수 없다.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 허허 웃음만 칠 일은 아닌 듯 한데, 함께 길을 걷는 동행자라해도 속 마음과 생각은 모두 다르니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앞으로 걸어가며 만나야 할 변화되어가는 세상을, 그냥 약간의 걱정스러움과 두려움을 안고 계속 걸을 뿐이다.  내가 판타지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보다.      



      


이전 03화 놀라운 동거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