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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민지 Feb 14. 2020

까만 한국 여자 이야기

당신을 미워해서 쓰는 글은 아니다.

 <난 슬플 땐 봉춤을 춰> 북토크에 갔다가, 몸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말라서, 뚱뚱해서, 까매서, 하얘서, 머리가 길어서, 짧아서, 근육량이 많아서, 적어서... '적절치 않아서' 온갖 이야기를 들으며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기준을 무엇으로 잡느냐에 따라 우리 모두는 필연적으로 소수자가 되는데, 그걸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다. 그래서, 오늘은 내 몸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나를 만나보지 않은 당신에게 내 몸을 이야기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사회가 내 몸을 부른 방법을 차용하는 것이 가장 빨리 내 몸을 시각화하는 방법일 테다. 나는 피부가 까맣고, 키는 174cm이고, 몸무게는 68kg가 나간다. 이 이야기를 하면 자판기처럼 툭 떨어지는 다음 말을 나는 평생의 경험을 통해 안다. "그렇게 안 까매." "그렇게 안 커 보여." "68킬로까지 안 보여." 나는 그 대답을 통해 상대가 가진 미의 기준을 파악할 수 있다. 68킬로보다는 적은 몸무게가 이상적이고, 174cm는 너무 큰 키인 것 같고, 피부톤은 좀 더 밝은 것이 예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많은 퀴즈를 풀 수 있다. 당장 당신의 외모를 사회가 묘사하는 방식대로 한 번 묘사해보면, 상대방에게서 돌아오는 답에서 많은 걸 유추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대답하는 사람의 말이 선의임을 안다. 내가 서른여섯이라고 했을 때 더 어리게 봤다고 말해주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더 어린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구나. 왜냐면 그는 절대로 "더 많게 봤는데!" 같은 말은 하지 않을 사람이기 때문이다. 배려의 말속에 언제나 자신만의 저울이 숨어있으니까. 그런 사람들을 타박하는 내 마음도 조금은 쪼그라들어있다. 내가 숨 쉬듯이 뱉어온 칭찬이, 대답이, 감탄이, 배려의 말이 어떻게 나의 저울을 드러냈는지 지금도 모르기 때문이다. 망설이느라 얼른 대답하지 못한 나의 정적 역시 분명 내 저울을 드러냈을 것이다.


 본격적인 내 외모 이야기를 하자. 나는 어릴 때부터 키가 컸고, 어릴 때부터 까맸다. 둘 다 한국 사회를 기준으로 한다. 아가 때, 내 신장이 큰데 말을 못 하자 동네 사람들은 다 큰 애가 왜 아직도 말을 못 하느냐고 우리 엄마에게 물었다고 한다. 내 외모는 어릴 때부터 사회를 걱정시킨 모양이다. 피부도 까맸다. 연년생인 언니는 비교적 뽀얀 피부를 가지고 태어났다. 키도 외모도 말투도 비슷했던 우리는 언제나 피부를 기준으로 평가의 말을 들었다. 깜씨, 깜둥이 같은 말을 어릴 때부터 또래 아이들에게 많이 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절망적이었던 것은 어른들이 하는 말이었다. 크면서 하얘진다고 했다. 그러니 걱정 말라고. 그렇게 어른들은 나에게 없던 까만 피부 걱정을 이식해주었다. 피부가 너무 까매서 큰일이라고, 어린 시절 내내 생각하면서 자랐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학습지를 하게 되었는데, 학습지 제일 뒷장쯤에 고민상담 편지를 보내면 답장을 해주는 안내문이 있었다. 나는 내 피부가 너무 까만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편지를 보낸 기억이 난다. 오색 색연필로 꾸며진 따뜻한 답장도 기억이 난다. 요약하자면, "피부를 하얗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은 민지양도 잘 알 것이에요.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매력적이고 건강한 나의 피부!" 지금 생각해보면 손글씨 답장을 준 것은 정말이지 대단하다. 서른여섯의 직업인으로서 생각해본다면 대단한 노동력 착취라고도 생각된다. 그게 내 기우였길, 적절한 업무량과 충분한 인력 고용으로 그분들도 낭만적인 산타 알바를 즐기셨길 바란다. 어쨌거나 나는 내 피부를 가지고 처음으로 어른과 이야기를 나눈 셈이다. 내가 살면서 가장 먼저 한 심리상담이었으리라.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었다.


 안타깝게도, "매력적이고 건강한 나의 피부!"는 또다시 나의 일상을 압박하는 요소였기에 나는 그 선생님의 마음만 따숩게 잘 받았다. (정말로 마음은 따숩게 받았다. 나를 위로하고 싶었던 한 바닥의 편지는 정말로 달콤하고 따뜻한 것이었다.) 내가 저 문장에서 위안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나는 까만 피부가 가진 사회적 기대에도 부응하지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운동을 정말로 못했다. 100미터 달리기를 하면, 우리 엄마는 언제나 결승선에서 박수를 치며 나를 기다렸다. 꼴찌로 들어오는 내가 울지 않았으면 했기 때문이다. 달리기도, 힘도, 방향감각도 없는 나는 까만 피부를 가질 자격도 없었다. 전학을 가면 농구부, 육상부, 배구부를 담당하는 선생님(주로 한 명이었던 것 같다.)이 나에게 와서 운동을 어느 정도 하냐고 물었다. 키가 큰 것은 내 특질인데, 팔다리가 긴 것만 특이고 피부가 까만 것은 야외운동을 많이 해서일 것이 분명하다고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 과정을 통해서 나는 또 새로운 사실을 수집하게 되었다. 나 정도 까맣게 되려면 야외운동을 많이 하는구나. 야외운동을 안 했다는 걸 감안할 때 나는 정말 비정상적으로 까만가 봐. 체육 시간에 피를 할 때, 가위바위보에서 이긴 친구가 1등으로 나를 고르고 기뻐하면 너무나 미안했다. 내겐 이제 반 전체를 실망시키는 일만 남았기 때문이다. 나는 까만 피부에 비해 운동을 못 하는데. 효용도 없이 까맣기만 한 피부를 가지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시대가 변하면서 까매서 예쁜 사람들이 등장했다. 시작은 이본이었고 완성은 이효리였다. 보통의 여성 연예인보다 톤 다운된 메이크업과 스타일링을 살려 매력을 발산하는 그들을 보면서, "까무잡잡해서 예쁜 사람 얼마나 많아? 민지 피부도 참 예뻐."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생겼고 나는 까만 피부로 할 수 있는 스타일링을 조금이나마 배우게 되었다. 하지만 앞뒤가 맞는 말은 아니었다. 까무잡잡해서 예쁜 게 아니라 예쁜 사람이 까무잡잡한 것이다. (생각해보니 까무잡잡 단어의 조어도 어딘가 밉다.) 이본과 이효리의 사진을 하얗게 보정하는 팬들도 있었고 그렇게 해도 예쁘기는 매한가지였다. 어쨌거나, 하얗지 않은 예쁜 사람의 표본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고 내 피부가 까맣다고 놀리는 것은 쿨하지 못한 것, 유행을 모르는 것, 촌스러운 것이 되어 조금씩 일상이 편해지고 있었다. 가끔은 "아, 나 피부 까만 여자 너무 좋아해."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 중 일부는 "나 피부 하얀 여자 좋아해."를 말하는 것이 굉장히 몰상식한 것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었다. 까만 여자를 좋아하는 것이 나의 PC함을 드러내는 것으로 사용되는 것이었다. 나 살집 많은 여자 좋아해, 나는 드세 보이는 여자 좋아해, 나는 까만 여자 좋아해. 합격 목걸이 주셔서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내 피부는 내 것인데, 그것에 대한 코멘트를 하는 것으로 보너스 포인트를 가져가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어른이 되고, 메이크업을 시작하면서 나는 나의 '까맘'을 좀 더 객관적으로 수치화할 수 있었다. 아니, 수치화하고 싶었는데 그것에는 실패했지만 어쨌거나 나름의 측량은 할 수 있었다. 13호, 21호, 23호 세 가지가 주로 나오는 한국 화장품 시장에서 나에게 맞는 톤은 아예 없었다. 대충 23호를 사서 발랐다. 그때는 23호가 맞다고 생각해서. 나는 점원이 추천해준 23호를 발랐을 뿐인데, 하얘지고 싶어서 가부끼 화장을 한 꼴이 된 경험을 몇 번 하게 되었다. 그게 어딘가 불편하고 수치스러웠던 나는, 백화점 1층의 글로벌 브랜드 화장품 가게에 가서 테스트를 하고 파운데이션을 샀다. 23호가 내게 안 맞는 것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제서야 내게 맞는 제품을 찾은 기쁨과 한국 시장에 내 제품은 없다는 사실 인식, 거기서 오는 명료한 소외감이 겹쳤다. 거기서도 점원은 내 피부를 한 톤 올리는 컬러 두 가지를 추천해주었다. 그냥 제 피부톤과 같은 색을 달라고 하면 조금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더 밝지도 더 어둡지도 않고, 얼굴의 톤을 균일하게 만드는 파운데이션을 추천해달라고 해도 한 톤 정도는 밝힐 수 있는 것을 제안했다. "목, 손이랑 비슷해 보일 톤으로 주세요. 저는 그걸 중요하게 생각해요." 하고 나서야 마음을 놓고 색을 맞춰주었다. 점원은 그냥 일을 잘한 것이다. 많은 파운데이션 구매자들은 내 피부를 한 톤 밝히는 목적으로 파운데이션을 이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님을 밝혔는데도 한 번에 내 요청을 들어주지 않은 것은 조금 서운했다.


 메이크업 제품이 아닌 로션을 고를 때는, 아주 높은 확률로 미백 화장품을 추천받는다. 나는 속당김이 없는 제품을 부탁했는데, 미백 코너로 데려가서 그 화장품 중에서 속당김 없는 것을 추천하곤 한다. 나는 미백을 할 생각이 없으며, 미백 화장품의 기능성 자체에도 회의적인 사람이지만 그런 것은 내 피부에 가려진다. 내가 다른 제품을 테스트하며 미백과 무관한 것들을 보고 있어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나의 동선과 나의 요청보다, 충분히 희지 않은 내 피부가 언제나 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사람들은 그걸 나에게 알려주는 데 망설임이 없다.


 예전에 노란 카디건을 길에서 발견하고, 마음에 들어 얼른 사서 입고 출근을 한 적이 있다. 누군가 나에게 "민지 그 카디건 입으니까 더 까매 보이네."라고 했다. 애초에 그 카디건을 살 때 예상했던 일이다. 파스텔톤, 원색톤, 형광... 그 어떤 걸 입든 더 까매 보인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검정, 흰색, 회색 등이 아닌 이상 어떤 색을 입든간에 한 번은 그런 말을 들어본 경험이 있다. 사실은 그 색이 문제가 아니라, 각자가 자기 안에 그려둔 이상적인 톤 매치가 너무 공고해서 그 바깥의 것을 이질적으로 느끼는 거라는 건 생각하지 않는다. 퍼스널 컬러니 뭐니 하면서, 얼굴을 밝혀주는 옷차림이 정형화된 세상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누군가 퍼스널 컬러 진단을 받아보니 재미있었다며 나에게도 해볼 것을 권유했는데, 나는 사실 그럴 필요가 없다. 평생을 진단받기 때문이다. 그거 입으면 까매 보여. 그거 입으니까 얼굴이 칙칙해 보인다. 노란 카디건을 보자마자 이미 누군가는 더 까매 보인다고 말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알 게 뭐야. 그러고 입고 갔더니 역시나 그런 말을 들었다. 뭐라고 대답할까 하던 차에, 그 말을 옆에서 들은 다른 사람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 먼저 대답할 타이밍을 놓친 나는 대답의 대상을 틀어, "아, 웃긴 얘기인 거예요?" 하고 말했다. 내 얼굴이 더 까매 보인다고 한 사람과 그 말에 웃은 사람을 포함한 좌중이 조용해졌다. 까만 사람에게 까맣다는 걸 지적하고 그 상황을 조소할 줄만 알았지, '노랑을 입는 것은 까매 보인다'는 말이 사실이 아니거나, 의미를 갖지 않거나, 조롱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황에 대해서는 대비가 안 된 것 같았다. "내 피부가 강조되는 색이라서 산 건데." 했더니, 노랑을 입으니 까매 보인다던 사람은 "그렇지! 내 말이 그 말이야." 하고 껄껄 웃었다. 기가 맥히게 잘 빠져나가네. "그렇죠?" 하고 내가 대답하는 바람에 웃은 사람만 가해자로 남았다. 내가 한 말은 내 피부가 강조되는 옷을 내 돈 주고 사 입었다는 것 밖엔 없는데 내가 여러 사람을 불편하게 한 구도가 되었다. 내 피부를 놀림감에서 구한 것이 이렇게 피곤할 일이라니. 표준의 외모를 갖지 않은 사람은 자기 외모를 유희거리로 헌납하지 않으면 이런 상황을 맞는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은 내 외모를 다시 올려치느라 부산스러워진다. "그럼~ 까무잡잡한 게 예쁘지. 외국에서는 일부러 부자 같이 보이려고 선탠을 한다잖아. 휴양지 많이 다니고 그랬다는 뜻이니까. 안 해도 되니까 얼마나 예뻐?" 알지요. 3달 내내 인턴으로 일하느라 집-지하철-사무실만 왕복해도 "좋은 데 다녀오셨나 봐~" 하는 소리를 언제나 들으니까요. 그런데, 그냥 제 피부 얘기를 안 하면 안 되는 건가요? 자꾸 실수하고 실패하잖아요. 그 실패의 원인이 내 피부에 대한 적절한 코멘트를 못 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뭐든 코멘트를 하기 때문이란 건 왜 모르는 거냐고요. 고백을 안 하면 차일 일도 없고, 결혼을 안 하면 이혼할 일도 없는데 고백을 하고 결혼을 하는 것은 그걸 걸어볼 만큼 내 인생에 중요한 것이 생겨서 아니던가요? 내 외모에 대해 뭐라도 말해야 한다는 그 강박은 어디에서 오는 거냐는 말이죠. 나의 까맘이 왜 그렇게 당신에게 중대하냐고요.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가 사랑이야.


 10명 만난 사람 중 가장 까만 사람을 만나, 그 유니크한 경험을 어떻게든 입 밖에 내야 하는 간절한 마음은 알겠다. 하지만 그걸 입 밖에 내는 것은 내가 가진 권력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사회가 그런 권력이 없다고 믿는 집단의 사람이 그걸 행사했을 때 얼마나 큰 위험에 처하는지 미디어를 통해 목격한다. 여성의 몸에 대한 거대한 품평이 자주 이루어지고, **kg 이상은 여자가 아니라고 말한다든가, 과체중의 여성을 연애 대상이 아닌 것으로 묘사하는 것은 예능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10년도 훨씬 더 지난 아주 아주 먼 옛날, 모 프로그램에서 여성이 신장 180cm 이하의 남성을 폄하하는 발언을 한 것이 지금까지도 밈으로 회자된다는 게 어떤 거대한 불평등을 드러내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까만 피부에 대해 코멘트할 수 있다는 것이, 자의적으로 한 피부평을 유희거리든 칭찬거리로든 삼은 것이 당신의 저울을 보여준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코멘트의 대상이 되는 일상을 평생 겪은 사람은 그 저울을 귀신 같이 알아본다.


 나를 존중하고, 내 권리와 존엄을 이해하는 사람을 찾는 가장 빠른 방법은 내 외모에 대해 코멘트를 하지 않는 사람을 기억하는 것이다. 현재까지는 아주 효과적이다. 서른여섯인 내가 수집한 가장 좋은 컬렉션은 그렇게 걸러져 내 곁에 있어주는 사람들이다. 55킬로까지 갔던 몸무게가 68킬로가 되었으며 앞으로도 늘어날 수도 줄어들 수도 있고, 점점 화장하지 않는 날이 늘어나고, 내 결점을 커버하는 옷 위주의 쇼핑을 그만두고도 늘어난 자유가 행복감과 비례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 것은 그런 사람들 덕분이다. 나는 내 외모를 칭찬하는 사람보다 내 외모를 그러려니 하는 사람이 훨씬 절실하고, 그런 사람의 요소들을 함께 그러려니 해주며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하길 좋아한다. 서로 앞에서 더 자연스러워질 수 있으며 그 자연스러운 상태 안에서 사랑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사람에게 나는 깊이 이입하고 큰 영향을 받는다.


 나의 까만 피부와 어울릴 줄 아는 그러려니스트들에게 사랑을 보낸다. 반대로 아직 그러려니 하지 못하고 경솔한 말을 하고 있을, 아직 남아있는 내 경솔한 숨들을 떠올리며 두려운 마음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나의 까만 피부로 어떻게든 대화를 시작하고 싶어 했던 당신에 대한 미움을 표현하고자 이 글을 쓴 것은 아니다. 오히려 까만 여자인 내가 평생에 걸쳐 길러온 촉으로 인해 나를 향한 당신의 다른 사랑들을 지워버리고, 당신이 꺼낸 내 피부 이야기만을 가지고 당신과의 거리를 결정해버릴까 봐 털어놓는 이야기이다. 수억 가지 살색 중 하나에 불과한 내 피부톤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서로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몸무게, 키, 피부색, 옷차림 같은 것에 대한 이야기를 생략할 줄 안다면 우리는 제한된 시간을 잘 써서 피부 밑의 내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몸은 까만 피부 밑에서 그런 낭만을 가지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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