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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민지 Dec 06. 2019

나를 위한 변명 : 걸그룹의 변화는 무조건 지지한다

여자가 살다 보면 이런저런 선택을 하는 거지.

20190914



여자애들 왜 그렇게 불만이 많아?

요즘 걸그룹 왜 이렇게 노선이 이랬다 저랬다야? 언젠 애교 떨면서 돈 벌어놓고 요즘은 왜 페미팔이해?

화장이 싫으면 하지 마, 왜 하면서 여자만 화장이 의무라고 투덜대?

왜 이렇게 시끄러워, 왜 이렇게 말이 많아?



투쟁은 약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투쟁이 수반하는 모든 과정에서 오는 부침도 약자의 것이다. 대상화되는 것도 모르는 사이 대상화된 것, 실제로 그것을 본인조차 적극적으로 선망하고 동참한 것 역시 약자였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내가 대상화의 선봉이 되어 소녀들의 세계를 위험하게 했다고 느꼈을 때의 자기반성, 약간의 현타 역시 약자에게만 잔인하게 온다. 이후 나와 너의 세계를 바꾸고자 새로운 시도를 했을 때 끊임없이 과거의 내가 빌미가 되어 그 진정성을 의심받는 것도, 약자에게만 일어난다.

애초에 강자는 이 모든 감시에서 CCTV 사각에 있다. 강자는 무고하고 무결해 보인다. 하지만 강자는 무결한 것이 아니다. 무결해보일 수 있는 권력을 손에 쥐었을 뿐. 강자가 강자인 이유, 기득권이 기득권인 이유는 애초에 그 세상이 기득권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선택하는 자이므로 선택받고자 나를 대상화하지 않아도 된다. 타인의 흥미를 위해 내 몸을 일상적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된다. 내 외모적 결함을 감히 지적하고 압박하는 사회가 아니므로 수술대에 눕거나 혹은 누워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하지 않아도 된다. 꾸미는 데 인생을 걸지 않아도 되고, 물론 ‘꾸’민 듯 ‘안’ ‘꾸’민 듯한 지점을 추구하느라 머리 터지지 않아도 된다. 세상은 어차피 내 위주로 세팅되어있으므로 수동적인 모습을 연기하거나 어필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면서 동시에, 강자는 자신이 하지 않는 온갖 것을 해대는 약자를 한심하게 볼 수도 있고 그걸 공공연하게 말할 수도 있다. 실제로 나는 쟤들이 왜 저러나 싶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주신 건데 태어난 얼굴대로 살아야지 수술은 왜 해?” “잘 먹고 운동하면 되지 왜 미련하게 굶어?” “여자애들은 왜 치마를 입고 나와서 계단에서 엉덩이는 가리냐?” “하이힐 신고 나와서 발 아프다고 난리야... 누가 신으래?” “바닷가 오는 애들이 대체 왜 다 풀메하고 오냐?” “여자애들 준비하는 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여자친구한테 그냥 나와도 된다고 했는데 맨날 한 시간 반씩 준비하고 나오더라. 나 이해가 안 가네...”

강자는 약자의 세계를 모르니까. 남친인 내가 쌩얼이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그걸 전달했는데도 민낯으로 등장하지 못하는 여친의 거대한 세계를 알 길이 없으니까. 선택받는 연애가 정답이라고 세뇌되어왔고, ‘사랑꾼’ 남친을 얻는 것이 엄청난 트로피이며, ‘꾸밈’은 만날 상대방에 대한 ‘성의’라고 배워왔고, 사회가 정한 미의 기준이 전세계에서 가장 명확한 나라에 평생 산 여친의 세계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 사이 여친은, 걸그룹은, 여성은, 나는 엄청난 변화를 마주한다. 몰랐던 꾸밈의 피로함이 밀려오기 시작하고, ‘사랑꾼’을 자처하는 남성은 훈남이 되지만 여성 사랑꾼은 짐이 된다는 걸 연예기사 댓글로 끊임없이 확인하고, 결혼식장에서, 클럽에서, 시상식에서 수트 하나로 퉁쳐지지 않는 여성의 의상이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중후한 남성 진행자 곁에서 진행자의 역할을 동등하게 하면서도 더 많은 피부를 드러내야 하는 방송이 재미없어지고, 못생긴 애 & 못생긴 애와 비교되는 예쁜 애 & 뚱뚱한 애 셋으로만 여성 희극인을 소비하는 개그 프로그램에서 멀어진다.

그러면 더 편해지고 행복해져야 하는 것 같은데, 오히려 더 불편해진다. 세상은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았는데 나만 자꾸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런 자각이 강해질수록 나를 혐오하게 된다. ‘남친한테 사랑받는~’ 으로 시작하는 콘텐츠를 열심히 보던 어린 날의 나, 올리브영 세일하면 가장 먼저 달려가던 나, 시상식에서 여배우의 개미 같은 허리라인을 열심히 찬양하던 나, 친구들과 연예인 입간판을 보고 어디가 예쁘네 어디가 못났네 했던 나, 운동만으로는 만들 수 없는 삐쩍 마른 팔뚝을 만들어서 여름에 당당하게(!) 드러내려고 식사를 조절하던 나, 그러면서도 이 모든 걸 ‘자기 관리’라 믿어온 내 삶이 아직 다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나 왜 이렇게 바보같이 살았지? 왜 내가 나 자신을 불행하게 해가면서 그게 불행인 줄도 몰랐지? 수입의 많은 비율을 꾸미는 데 쓰면서도 왜 그게 문제라고 자각하지 못했지? 뭐 때문에 그렇게 다이어트를 한 걸까? 그래서 내가 얻은 건 힘없고 얇아진 몸뿐인데, 왜 그걸 내가 원해서 한 거라고 착각했지?


동시에, 그렇다고 해서 나를 한 순간에 해방시키지도 못한다. 꾸미고 살면서 느낀 피로감의 실체를 알아내고서도, 피로해도 그걸 하도록 부추긴 세상은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고 그것에 맞춰 살아온 내 세계관도 하루아침에 바꾸기 힘들기 때문이다. 여전히 내 몸매의 단점이 조금이라도 드러나는 옷은 아무리 예뻐도 걸쳐볼 용기가 안 나고, 살이 붙으면 절식하고 싶고, 중요한 자리에 민낯으로 대차게 나갈 용기도 없다. 내 달라진 시각을 누군가에게 말하려 해도 말실수를 했다가는 ‘메갈’ ‘웜충’ 소리를 들을 것 같아서 적절히 웃으면서 넘기던 방식을 여전히 애매하게 활용하며 산다.


그러면서 이런 여론도 목격한다. “나는 ‘내가 좋아서 화장하는 거’라고 말하는 여자들 한심하다.” “자연스럽게 나이 드는 게 아름답다고 하면서도 리프팅에 관심 갖거나, 브이라인 같은 개념 사라져야 한다고 하면서 보톡스 맞는 여자들 문제야.” “니들이 남자보다 더 나빠. 결국 니들이 팔아주니까 그 업계가 돌아가잖아, 같은 여자가 그러면 돼?”


다 맞는 말 같아서 내가 더 싫어진다. 그래서 섹시한 의상을 매번 들고 나오는 걸그룹을 무턱대고 비난할 수가 없다. 저 그룹은 회사가 정해주기나 했지, 나는 내가 사서 내가 입고 다녔는데. 요즘도 그런 일상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어쩌면 또 똑같은 섹시컨셉 가지고 나온 걸그룹이 나보다 나은지도 몰라. 저 친구들은 보이는 게 직업이고 매출이랑도 연관되는 데다 거대한 회사처럼 움직이잖아. 어쩔 수 없지. 아니지, 이렇게 관대하게 생각하니까 저런 게 반복되잖아. 애초에 쟤네가 유행시켜서 그런 거잖아. 변화를 원하면 강경해야지. 소비해주지 않거나 비난여론을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닐까? 아니다. 그래도 같은 여성으로서 지지해주는 게 맞지 않나?


이 모든 머리 터지는 고민은,

우리만 한다.

우리가 약자니까.


강자의 세상에 길들여져서 살아온 과거를 미워하는 것도, 그 과거를 단번에 끊어내지 못하는 나를 미워하는 것도, 변화의 속도가 다른 같은 여성을 원망하거나 질책하는 것도, 이 모든 게 약자인 여성의 세계에서만 이루어진다. 그래서, 내가 더 사랑하는 내가 되고자 꾸준히 고민하는 나는 여전히 약자라 피곤한데도, 나 자신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모순과 반성 때문에 또 나를 미워하게 된다. 내가 나인 채로 편하게 살고자 하는 작은 욕망 하나를 이루자면 너무 많은 투쟁을 해야 한다. 투쟁은 약자만의 몫이니까.



얼마 전 한 걸그룹이 노출 1도 없는 수트와 멋진 컨셉으로 화제를 모았다. 대한민국에서 활동해온 걸그룹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간 수동적인 여성상이나 섹스어필에 충실한 컨셉도 여러 번 해왔다. 그중 한 멤버는 워낙 아이코닉한 인물이기 때문에, 선망과 비난을 동시에 받기도 했다. ‘너 때문에 여성인권이 50년쯤 후퇴했다’는 짤이, 다른 걸그룹처럼 이 팀의 댓글에도 빈번하게 등장했었기에 그 엄청난 변화에 많은 사람들이 감명을 받았다. 그간 신어온 높은 하이힐과 노출, 섹시한 댄스는 남성 댄서에게 맡기고, 대중이 자주 못 본모습으로 무대에 서서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간 성적 대상화 신나게 해놓고 이제 와서 태세 전환한다”는 댓글도 왕왕 보인다. 그 댓글을 읽는 평범한 사람인 나는 갑자기 주눅이 들고 서운해진다. 최근 내 안에서 나를 괴롭혔던 마음이 글이 되어서 거기 적혀있다. 애초에 일관적이지 못했던 것은 나 역시 이 세계의 피해자였기 때문이고, 나도 힘든 고민을 거쳐 나와 내 친구들, 그리고 내 이후의 소녀들을 생각하며 일상의 싸움을 이어가는 중인데. 강자가 구축한 세상에서 자신마저 그 악순환의 동력이 된 것을 나 역시 후회하는데, 거기에서 나아지는 중인 내가 모순이라고 비난받는 것은 더 서럽다. 또한 내가 알기로, 이 팀은 밴드 컨셉으로 데뷔했다가 실패하고 그룹 존폐의 위기에서 섹시컨셉으로 회생해 여기까지 왔다. 자기 자신을 대상화해가며 버티지 않았다면 오늘 같은 기회는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방식이 옳은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화살이 이 여성들에게 가는 것이 부당하다는 생각은 든다. 이것을 걸그룹의 책임으로만 돌릴 때 그 모든 비난에서 자유로워지는 건 이 세계를 구축한 강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걸그룹을 미워할 수 없다. 걸그룹이 과도한 섹시컨셉을 들고 나와 그 여성들이 비난의 화살을 맞고 감정적 소모에 시달릴 때, 그 판을 만든 사람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오늘 내가 본, 박수치고 싶은 컨셉을 들고 나온 여성들이 있을 때 온 마음을 다해 지지하고 유난 떨고 소문내기로 했다. (몇 달을 미루던 이 글이 그 일환으로 드디어 나왔다.) 그게 그 여성들에게 용기가 되고, 기획자에게는 시장의 여론이 되고, 소비구조가 될 수 있도록. 벗지 않아도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 열리고 있다, 이래도 여성한테 지랄 저래도 여성한테 지랄이던 세상이 분명히 바뀌고 있다, 여성의 외형보다 목소리에 더 지갑을 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실제로 아이돌로 데뷔하는 것 외에 춤과 노래로 대중 앞에 설 기회가 적은 나라에서, 꿈을 가지고 어린 나이에 들어가 남들보다 더 좁은 세상에 살았던 소녀들의 변화를 응원한다. 예전에 어떤 모습과 발언으로 인기를 끌었든, 그리고 지금의 과정이 타인이 보기에 만족스럽든 그렇지 않든, 그 투쟁의 힘듦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나를 시달리게 한 사회에 부정적으로 기여했고, 부역했지만 결국 그게 잘못되었다고 선언할 수 있는 것 역시 나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각한 약자의 권리이지, 강자의 맨스플레인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나는 이제 체중감량을 신경 쓰지 않고, 10년 만에 근육과 함께 달라진 내 옷 사이즈를 긍정하고, 민낯으로 회의에 가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꾸미는 데 쓰는 비용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모든 꾸밈을 부정하거나 그만두지도 않았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논리적으로 무엇이 옳은가보다 어느 지점의 내가 가장 편안한가이기 때문이다. 그 지점은 앞으로 점점 변화하겠지만, 나는 내가 어느 지점에 있는가를 두고 나에게 가혹하게 굴지 않을 것이다.

타인에게도 마찬가지다. 가녀린 팔뚝을 위해 절식을 하든, 월급의 절반을 화장품 사는 데 쓰든, 남친에게 잘 보이는 데에 인생을 걸든 그 여성에게 가혹하게 굴지 않을 것이다. 그가 어느 지점에 있든 그 세계를 함께 사는 동료로서, 그의 평안함과 자기 긍정을 언제나 응원할 것이다. 그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도 더 관대할 것이다. 왜냐면 우리는 약자이고, 우리끼리는 좀 그래도 되니까. 어차피 세상은 강자의 룰로 여전히 우리를 지지고 볶을 것이니까.

걸그룹이 어떤 컨셉으로 나오든 그 선택에 누군가 감히 해석을 갖다대지 않는 세상이 오기를 소망한다. 언젠가는 꾸밈이나 섹스어필이 나 자신도 동의하는지 헷갈리는 자기 방어 논리가 아니라 진정한 취향의 일종으로 여겨질 수 있도록, 그를 둘러싼 현재의 거대한 강요가 해제되기를 소망한다. ‘여장’은 꼴불견이고 ‘남장’은 멋있다는 말에 숨겨진 혐오가 사라지길 소망한다.



내가 편하게 살고 싶어서,

걸그룹의 변화는 무조건 지지하기로 했다.

우리 걸그룹 하고 싶은 거 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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