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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na Nov 12. 2022

살고 잘살고 그냥 살고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는 건 쓸모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혹시나 가지를 곧게 뻗은 사철나무가 있을 수 있고 이름 모를 작은 새가 지저귀며 날아들 수도 있지만 지금 내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불 꺼진 집 안으로 한 발짝씩 디뎌 불을 켜도 환해지지 않는다. 나갈 때와 똑같이 달라진 게 없는데 알 수 없는 당혹감에 휩싸여 몸 둘 바를 몰라 한다. 여기는 어디지. 불을 다시 꺼보기도 하고 신발을 갈아 신어본다. 이대로 나가야 하나 싶지만 갈 곳이 마뜩잖음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기에 머리를 조금 흔들어서라도 이곳이 나의 집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더듬더듬 걸어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손을 씻고 얼굴도 씻는다. 밥도 먹고 TV도 본다. 멍하니 있다가 이불을 무릎까지 덮은 채 쌓아둔 책을 하나씩 집어 든다. 나의 몸은 제법 익숙한 놀림으로 움직인다. 그러니 이 섬에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라고 알게 한다.     


다음 날도 나는 섬에서 눈을  책을 는다. 정말 책만 읽다가, 진한 커피 생각을 한다. 때마침 선물 받은 드립백이 눈에 띈다. 드디어 마시는구나 하며 몸을 일으켰는데 커피잔들이 눈에 차지 않는다. 받침이 있는 커피잔에 제대로 내려 마시고 싶다. 눈알도 굴리고 머리도 굴린다. 책상 위에도 책상 밑에도 포장을 뜯지 않은 머그잔과 커피잔 세트가 있다. 찬장을 열어 고개를 한껏 들어보니 거기에도 뽁뽁이로 감싼 잔들이 고이 모셔져 있다. 엄마 생각이 났다. 좋은 것들은 죄다 신문지로 꽁꽁  어느 구석으로 쟁여놓던 엄마. 좋은  그냥 쓰는 거라고 말해도 시집갈  준다는  같은  하지도 않고 나중에  쓰게 되어 있다는 말만 하던 엄마. 요즘도 집에 가보면 신문지로 싸인 것들이 한껏 있다. 도대체 나중은 언제 오는 걸까. 엄마도 모르겠지.     


받침이 있는 것으로 고른다. 뽁뽁이를 제거하고 컵과 받침에 베이킹소다를 양껏 푼 다음 온수를 받는다. 물이 뿌예진다. 깨끗하게 하려다 오히려 나와 세상을 더 오염시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갑자기 깨끗해지고 싶다. 깨끗하게 만들고 싶다는 기분이 차오른다. 마치 나의 사명처럼, 해결해야 할 막대한 책임처럼 부푼다. 오래 쓰지 않아 먼지가 앉은 밥그릇과 국그릇 큰 접시와 작은 접시들 용도를 알 수 없는 플라스틱 통들 직구로 사다 모은 소스 병들이 수두룩 소주잔이 여섯 개가 넘고 도꾸리 병과 잔도 있다. (넌 어디서 왔니) 텀블러도 분에 넘치게 많고 비닐포장지와 종이로 된 컵홀더도 버리지 않고 알뜰하게도 쟁였다. 오늘 이 모든 것들을 버리거나 남기거나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청소를 시작한다. 아니다. 그냥 시답잖게 먼지만 훔치는 일이 아니니까 대청소를 결심해야지.

    

굳어버린 소스가 잔뜩 담긴 소스 병들을 과감하게 버린다. 비닐들은 급할 때 요긴하게 쓸 테니 눈에 띄는 곳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가 나간 그릇들과 누렇게 변색 된 플라스틱 반찬 통도 버리는 것으로 한다. 먼지 쌓인 그릇들은 개수대로, 잘 쓰지 않는 그릇들도 일단은 개수대로 몰아넣는다. 텀블러는 선물로 받은 것들이 많아 나눔을 할까 돌려가며 잘 쓸까 들었다가 놓았다가 결정을 못하고 일단은 그 자리에 그대로. 옥수수차 우엉차 도라지차 읽을 수도 없는 나라에서 온 차 티백까지. 유통기한은 보이지도 않고 더는 유통할 의지도 없으니 이것도 버린다. 이것도 버리고 저것도 버리고 버리고 버린다. 무조건 버리는 게 청소인가 싶어 뭐지 싶다.      


돌아보니 삼 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여긴 여전히 섬이다. 아무렇게 쌓아놓거나 나조차 찾지 못하게 숨겨놓거나 그래서 뽀얀 먼지를 먹게 만들어 결국은 버리고 마는. 결국은 홀로 섬에 남고 마는. 그런 시간이었나.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책만 읽어대고 다짜고짜 커피잔 세트를 찾고 대청소를 핑계 삼아 버리고 버리고 버리는 거냐고 묻는다. 결코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만, 지금은 답할 힘이 없다. 그러니 지금 나는 대청소를 해야겠다. 청소를 하고 나면 그래서 버리고 버리고 버리면 또 무엇이 남는지 무엇을 남길 건지 알게 되겠지. 나는 퍽 계획적인 인간이라 사실은 이 모든 게 나의 계획이라고 말한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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