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농부들, 삶의 균형을 찾다
친한 선생님이 옥수수를 몇 개 건네주셨다. 학생들에게 받았는데 자신은 최근에 옥수수 한 박스를 사서 이미 많다며, “선생님은 옥수수 킬러니까 가져가서 먹어”라며 덧붙이셨다.
“학교 아이들이 텃밭에서 직접 키운 거래요.”
집에 와서 옥수수 껍질을 벗기면서 문득 궁금해졌다. 도대체 누가 이 옥수수를 키운 걸까? 다음 날 학교에서 물어봤다. 알고 보니 고3 아이들이었다. ‘농부의 마음’이라는 이름으로 텃밭을 가꾸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엔 조금 의외였다. 영어 약자나 줄임말로 트렌디한 이름을 지을 법도 한데 이들은 아주 단순하고도 진심이 느껴지는 이름을 붙였다. 더 놀라운 건 그 활동을 사진과 함께 SNS에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3이 수능을 얼마 남기지 않은 이 시기에, 도대체 언제 농부로 변신하는 걸까?
오늘날 많은 학생들은 대학 입시라는 거대한 산을 넘기 위해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간다. 늦은 밤까지 공부하는 모습은 어느새 ‘정상’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우리는 가끔 중요한 사실 하나를 잊는다.
“사람은 공부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고3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참여하는 ‘농부의 마음’ 활동을 보며, 나는 그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이들은 라임, 옥수수, 감자, 수박 등 다양한 농작물을 기르며 공부 외에도 삶의 중요한 가치를 배우고 있다. 공부에 대한 열정 못지않게 흙을 만지며 얻는 기쁨과 성취를 통해 자신을 키워나가고 있는 것이다.
‘농부의 마음’은 단순히 작물을 키우는 활동이 아니다. 이 모임은 협동심, 책임감, 인내심 같은 삶의 중요한 요소들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는 장이다. 매일 아침 일찍, 혹은 점심시간이나 하교 후 텃밭을 돌보는 학생들의 사진에서는 피곤함보다는 성취감이 묻어난다.
한 학생은 직접 키운 오이 하나를 이번 학기에 취임하신 교감 선생님께 드리며 말했다.
“교감선생님 되신 거 축하드립니다.”
작은 오이 하나지만, 그 속에는 학생의 마음과 노력, 그리고 땀 흘린 공동체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어떤 어른들은 “왜 공부 안 하고 그런 데 시간을 쓰냐?”라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질문에 대답하는 건 바로 이 학생들이다. 농부들 중 한 학생은 1학년 때부터 수업 태도가 좋아 모든 선생님들에게 관심을 받고 있고, 또 어떤 학생은 내신 1등급에 모의고사 만점이라는 성과를 이뤄내기도 했다. 성적이 그리 높진 않지만 늘 밝은 미소로 교사와 친구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학생도 있다. 이들은 텃밭에 물을 주는 것만큼이나 자신의 학업과 삶에도 정성을 들이고 있다.
이 학생들이 보여주는 균형 잡힌 삶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통해 에너지를 얻고 그 에너지를 학업에 집중하는 데 활용할 줄 안다. 텃밭에서 얻은 책임감과 성취감은 학교생활, 공부, 인간관계에서의 동기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들의 긍정적인 에너지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준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고 즐기는 일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몸소 느끼면서 주변 사람에게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물음에 대한 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삶의 진정한 성공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외우고 암기했느냐가 다가 아니다. 대신 얼마나 많이 배우고, 느끼고, 나누었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농부의 마음’을 가진 고3 학생들이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이 학생들을 보면서 공부와 좋아하는 일을 균형 있게 병행하며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가는 것이 진짜 교육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는 때때로 아이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가르치려 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배워야 하는 건, 주어진 하루를 성실히 살아내는 아이들의 태도인지도 모른다. 땀 흘리며 흙을 만지고 작은 싹 하나에도 기뻐하며, 함께 웃고 나누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나는 진짜 배움의 의미를 다시 떠올렸다.
어쩌면 아이들은, 교실보다 텃밭에서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16년간 써온 글이 '나도 10대는 처음이라서'라는 이름의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저의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52438150
https://smartstore.naver.com/aladinstores/products/12304442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