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났지만 사라지지 않는 추억들
초등학교 5학년, 같은 반에서 처음 만난 친구가 있었다. 중학교에서도 같은 반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우리는 계속 붙어 다녔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서로의 하루를 가장 먼저 공유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웃긴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 속상한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전화하게 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그 친구였다.
우리는 함께 여행도 많이 다녔다. 계획도 없이 떠난 여행도 있었고, 밤기차를 타고 무작정 바다를 보러 간 적도 있었다. 돈이 없어서 숙소 대신 찜질방에서 밤을 보내기도 했고, 비를 맞으며 길을 헤매다가 웃음이 터진 적도 있었다. 그 모든 순간들이 이상하게도 힘들기보다는 즐겁게만 느껴졌던 시절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여행을 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시간을 함께 건너가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친구가 일 때문에 먼 먼지역으로 이사를 갔을 때도 우리는 멀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자주 연락을 했다. 틈만 나면 통화를 했고, 나의 일상을 길게 적어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친구의 휴가 날짜가 정해지면, 나는 내 일정을 조정해서라도 그 시간을 비워 두었다. 그리고 그 친구가 있는 곳으로 내가 찾아가기도 했다. 물리적인 거리는 멀었지만, 마음의 거리는 오히려 더 가까워졌던 시기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가 다시 가까운 거리에 있게 되었을 때 관계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서로의 집은 차로 30분 정도 거리였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만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런데도 우리는 점점 덜 만나게 되었고, 연락도 점점 줄어들었다. 어느 날은 문득 깨닫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연락한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직업이 달라서일까? 삶의 방식이 달라져서일까?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서로의 일을 이해하려고 했고, 오히려 다른 분야의 이야기를 들으며 새로운 세상을 배우는 즐거움도 느꼈던 사이였다. 공통점이 줄어들었다고 해서 관계가 사라질 정도의 얕은 인연은 아니었다.
돌이켜 보면, 친구는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았다. 내가 의견을 말하고 “너는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으면, 친구는 “네가 말한 게 좋은 것 같아”라고 답하곤 했다. 처음에는 그것이 배려라고 생각했다. 나를 존중해 주는 방식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점점 그 친구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떤 선택을 하고 싶은지 알고 싶어졌다.
나는 내 일상을 자세히 이야기했고, 친구는 그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공감해 주었고, 위로해 주었다. 하지만 친구 자신의 이야기는 늘 어딘가 비어 있었다. 그 공백은 처음에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쩌면 관계의 균형이 조금씩 어긋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말하고, 누군가는 듣기만 하는 관계.
누군가는 다가가고, 누군가는 받아주기만 하는 관계.
그 작은 기울어짐이 쌓여서 결국은 서로가 먼저 연락하지 않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락이 오지 않아도 딱히 궁금하지 않고, 만나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은 관계. 그렇게 우리는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멀어졌다.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관계도 그런 것 같다. 눈에 보이는 사건이나 갈등이 없어도, 보이지 않는 감정의 변화가 관계를 바꾸어 놓는다. 우리는 싸운 적도 없고, 서로를 상처 입힌 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는 멀어질 수 있다. 그것이 관계의 가장 낯설고도 씁쓸한 부분이다.
며칠 전 사진 여행 폴더를 열어 보았다. 그 친구와 함께한 여행 폴더가 내 가족과 함께 갔었던 폴더보다 더 많았다. 사진 속 우리는 늘 웃고 있었다. 바람에 머리가 헝클어진 채로 웃고 있고, 엉뚱한 포즈를 취하며 웃고 있고, 아무 이유 없이도 웃고 있다. 그 웃음들을 보고 있으면 문득 '아, 그때 정말 그랬었지.'라는 생각이 든다.그 시절의 우리는 서로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존재였다. 특별히 애쓰지 않아도 이어져 있었고, 이유 없이도 함께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오래갈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믿음은 어쩌면 너무 당연하게 여겼던 것에서 비롯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흔히 “시절인연”이라는 말을 한다. 그 시절에 만나서, 그 시절에 가장 빛나고, 그 시절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흩어지는 인연 말이다. 처음에는 그 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도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알 것도 같다. 모든 관계가 끝이 있어서가 아니라, 각자의 시간 속에서 머무르는 자리가 다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친구와 함께했던 그 시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함께했던 기억은 여전히 남아 있고, 그 기억은 여전히 따뜻하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 시절의 공기와 웃음과 감정은 쉽게 바래지지 않는다. 사람은 만남으로 인해 성장하고 이별로 인해 성숙해진다. 관계의 변화는 때로 아프지만, 그만큼 나를 조금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든다. 붙잡고 싶다고 해서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멀어졌다고 해서 모두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는 알게 된다.
이 관계를 떠올리면 슬픔보다는 묘한 따뜻함이 먼저 떠오른다. 우리는 서로의 삶 속에서 충분히 깊이 스며들었고 그 시간은 분명 서로를 더 넓고 깊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막무가내로 떠났던 여행도, 아무 의미 없이 길게 나눴던 대화도, 돌아보면 모두 의미가 된다. 그때는 그저 즐거워서 했던 일들이었지만, 지금의 나를 이루는 조각들로 남아 있다. 그 모든 순간들이 나의 찬란했던 20대와 30대를 채우고 있다.
그래서 이 관계를 아쉬움으로만 남기고 싶지는 않다. 끝내 이어지지 못한 관계가 아니라, 한 시절을 누구보다 충실하게 함께 걸어준 인연으로 기억하고 싶다. 우리는 멀어졌지만, 함께했던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시간은 여전히 내 안에서 살아 있고, 가끔씩 꺼내어 볼 수 있는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이제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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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간 써온 작가의 다른 글들이 '나도 10대는 처음이라서'라는 이름의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저의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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