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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귤선생님 Apr 19. 2022

너는 늦지 않았다

3학년 담임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바로 “선생님, 지금 시작하면 늦은 걸까요?”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늦었다. 그냥 늦은 것도 아니고 아주 많이 늦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고3에서 뭔가 새로운 걸 배운다기보다 그동안 배운 것을 복습하는 과정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3학년에 올라와서야 열심히 하려고 해도 이런 아이들은 수업 시간에 집중하는 게 너무 어렵다. 거의 전 과목이 교과서를 간단히 훑고 나자마자 EBS 수능 교재들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이미 기본적인 것들을 다 알고 올라와서 복습하거나 자신의 지식을 다시 한번 확고히 다지는 아이들 사이에서, 그것도 수업시간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제 시작하는 아이들은 수업시간에 참여하기보다 기본적인 이론 내용을 다시 공부할 수밖에 없다. 그것도 선생님에 따라 ‘고3이니까 다른 공부 하는 건 봐준다’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기도 해서 수업 중에 몰래 자신만의 공부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 열심히 하기란 꽤 어렵다. 이런 학생들은 눈으로는 자신의 공부를 바라보고 있지만 다른 생각을 하거나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많이 봐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나는 학생들에게 “너는 늦었어”라고 절대 말하지 않는다.

당연하지 않은가.

수능을 몇 개월 앞둔 학생들은 누구나 “넌 잘할 수 있어.”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1년 만에 정말 열심히 한 결과 수능을 굉장히 잘 본 경우도 간혹 있다. 물론 이런 아이들은 기본적인 공부 머리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잘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얼마 남지 않은 기간 동안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며, 비록 성적이 크게 오르진 않아서 자신이 목표로 했던 곳에 합격하진 못해도 그동안의 공부에 대한 집중력과 끈기를 가지고 있어서 때문인지 자신이 생각했던 곳보다 조금 낮은 대학이나 학과에 가서도 장학생이 되거나 복수전공 같은 길을 찾아가기 때문이다.

아무리 고3이라고 해도 여전히 늦지 않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또 있다.

공부에 대한 이해도가 그리 높은 것 같지는 않지만 정말 막무가내 스타일로 미친 듯이 공부에 매진하는 학생들이 있는데 예전에 한 학생이 바로 이런 경우였다. 내신이 6등급 정도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자신은 집안 형편이 좋지 않기 때문에 무조건 국공립대학교에 합격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정말이지 공부만 했다. 그 학생의 영어 모의고사 점수는 50점대였고 교무실에서 질문이 있다며 쉬는 시간마다 나를 포함해서 여러 선생님들은 찾아다녔다. 결국 이 학생은 총 두 곳의 지방 국립대에 합격했다.

수능 이후 정시 상담을 할 때 역시 비슷한 질문을 듣는다. 이미 시험 결과는 나왔고 정시 원서를 넣어야 할 학교나 학과도 정해져 있지만 원하는 곳이 아닐 경우에 그렇다. 나는 작년에 재수를 고민하는 두 명의 학생에게 “걱정하지 마. 재수해도 절대 넌 늦은 게 아니야”라는 말을 해 준 적이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른 입장에서 봤을 때 1년 정도 재수를 한다는 건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 전혀 불이익을 끼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제 막 대학교에 들어간 스무 살 친구들과 비교했을 때 1년 더 재수를 한다는 게 한참 뒤처졌다고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업을 하지 못해서 오랜 세월 동안 힘들어하다가 서른 살이 되어서야 드디어 직장인이 된 친구도 있고, 4년 동안 경찰 공무원 시험에서 떨어졌다가 5년째 되는 해에 합격한 친구도 있다. 나 같은 경우에는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에 사회생활을 하다가 다시 시험을 보고 영어교육과에 들어갔으니, 이렇게 흔들렸던 2,30대를 보냈던 사람들 눈에 스무 살 재수쯤이야 전혀 늦은 거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게다가 정말 열심히 노력했으나 수능 시험을 생각했던 것보다 잘 보지 못해 최저점을 맞추지 못한 나머지 최종에서 떨어진 경우에 라면 더더욱 그렇다.

어제 고등학교 2학년 수업에 들어가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얘들아, 고3 선배들 상담하다 보면 가장 후회한다는 시기가 언제인 줄 알아? 바로 고2야. 1학년 때는 막 고등학교에 올라왔으니 어느 정도는 열심히 하다가 2학년 때쯤 슬럼프가 와서 공부를 제대로 못한 게 후회가 된다는 거야. 너희들은 작년에 고3 선배들이 그토록 다시 갖고 싶었던 고2라는 인생의 길을 걷고 있어. 내년에 늦었다고 후회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오늘을 열심히 살기를 바란다.”

물론 이 말을 듣고 많은 아이들은 또 선생님의 잔소리겠거니, 하면서 한 귀로 흘려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단 한 명이라도 ‘아, 그래! 나는 오늘부터라도 열심히 해서 내년에 절대 늦었다고 후회하지 않아야겠다’라고 생각한다면 내 계획은 성공한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오늘도 난 피곤에 지친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하러 간다.

모든 꿈은 인내와 만나야 비로소 현실이 된다.

우리는 공부를 통해 인내를 배운다.

-강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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