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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호 Nov 23. 2019

두 개의 섬 1화

부끄러움과 욕망에 대하여, 


1화 : 부끄러움과 욕망에 대하여




그가 처음 발걸음을 향한 곳은 머나먼 북쪽의 겨울의 섬이었다. 초콜릿과 우유, 거대한 바다생명체 요리와 끝없는 설경으로 유명한 겨울의 섬은 그의 머릿속에서 마냥 신비롭고 매혹적인 장소로 그려졌다. 그는 눈밭에 작은 발자국을 남기는 흰빛의 여우를 상상했고, 눈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뜨거운 온천에 몸을 담그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얼어붙은 호수에서 마시는 따뜻한 차 한잔도, 눈 덮인 설원에서 한송이 겨울꽃을 찾는 것도 모두 그가 꿈꾸는 겨울 섬 여행의 일부였다. 그는 참 많은 상상을 했고, 그래서 도착한 순간 상상하지 못했던 유일한 한 가지를 마주쳤을 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앞에 완연한 것은 가을이었다.


겨울의 섬은 가을로 물들어 있었다. 곳곳에 울긋불긋한 단풍이 화염처럼 번졌고 다람쥐들은 도토리를 줍느라고 바빴다. 그가 상상했던 끝없이 쌓인 눈과 고요의 세계는 물론 도래할 것이었지만, 아직 몇 개월의 시간이 남아있는 셈이었다. 그의 눈 앞에는 적막 대신 생의 환희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가 첫 번째 여행지로 겨울의 섬을 골랐던 것은 비단 겨울을 보고 싶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사실 그는 매서우면서도 온정 넘치는 겨울보다도 그 겨울을 머금고 살아가는 당찬 사람들을 보고 싶었다. 날씨가 추워지면 사람들은 언 몸을 녹이기 위해 참새처럼 옹기종기 붙어 앉는 습성이 있었다. 시린 손을 서로 잡아주고 식은 몸을 따뜻한 마음으로 데워주는 것은 겨울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는 추위 속에서 함께 살아남기 위한 이들의 지혜를 배우고 싶었기에 겨울의 섬을 첫 목적지로 골랐었다. 그리고 비록 섬에 겨울이 채 도달치는 못했어도 함께 사는 모듬살이의 온기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기에 그는 당혹은 했어도 망설임음 없이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겨울의 섬은 그가 평생을 살아온 작은 나라와 거의 비슷한 크기였다. 그리고 그 넓디넓은 섬의 영토 대부분은 짙은 평야와 아름다운 호수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섬의 심장 역할을 하는 도시 하나만큼은 그 모든 것의 한가운데에서 박동했는데, 그는 가장 첫 번째로 이 도시에 들리기로 마음먹었다. 섬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도 필수적인 일이라 여겨 선택한 일이었지만, 그는 도시에 들어서는 순간 화려한 풍경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비록 세계 유수의 번화가들에 비하면 손꼽힐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도시의 번화가는 그럼에도 소박한 화려함을 머금고 고유한 색채로 빛났다. 중앙 대로변 높은 건물 정면에서는 독한 증류주를 들고 함박웃음을 짓는 겨울 할아버지가 스테인글라스로 조각되어 있었다. 도시의 상징이자 명물이라는 겨울 할아버지의 미소는 모든 사람들이 겨울의 섬에 들렸음을 증명하기 위해 사진에 담아 가는 성지와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에겐 그 장면이 왠지 모르게 선정적으로 느껴져서 눈길을 줄 수 조차 없었다. 물론 겨울 할아버지께서 웃통이나 아랫통을 까고 계시다거나 옆구리에 사슴뿔 달린 야시시한 여성을 끼고 계셨던 것은 아니지만, 그곳을 지나치는 모든 사람들의 행동이 조금은 선정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모든 여행객들이 모여 모두 같은 장소를 같은 구도로 찍으며 같은 웃음을 짓는 것을 보며 그는 들춰보면 안 되는 종류의 비밀을 엿보는 것 같은 느낌마저도 받았다. 그것은 어쩌면 그의 고고하고도 오만한 여행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고유해야 하는 모든 사람의 여행이 똑같은 것으로 전락하는 것이 퇴폐적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에게 그건 마치 첫사랑을 오랜 시간이 지나 환락굴에서 마주치는 것과도 같은 종류의 일이었다. 그래서 자괴감과 불편함이 그 순간의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변 건물들에는 겨울 할아버지와는 조금 다른 상품들도 광고되고 있었는데, 그 종류와 특이성이 무척 자극적이고 다채로운 것이었다. 그는 어째서 토끼를 형상화한 옷이 망사와 끈 속옷으로 변질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잠시 고민에 빠졌다. 간호사는 가터벨트를, 의사는 가슴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가운을, 경찰관을 엉덩이가 보일듯한 치마를 입는 것 역시 연유를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처럼 성적 욕망을 자극하는 퇴폐적인 광고들이 대낮, 대로변, 도시의 중심지에서 시끄럽게 방영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정보를 얻기 위해 들어간 안내소에서 그것부터 물어보았다. 그러자 안내원은 대답했다.


"이 곳은 환락의 성지니까요."


그는 이 섬사람들은 참 이상한 곳에 '성지'라는 단어를 쓴다고 생각하며 안내원의 이야기를 들었다. 안내원은 부끄러워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대신 기묘한 자부심과 '어떻게 그런 것도 모를 수가 있죠?'라는 의아함이 그 대답에 담겨 있었다. 안내원은 계속해서 말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겨울의 섬은 근처 모든 섦들 중에서도 가장 화려하고 사랑스러운 환락가를 가진 것으로 유명했답니다. 그것이 자랑이자 명물이었지요. 겨울의 섬 여자들은 첫눈처럼 하얀 피부와 산딸기같이 달콤한 입술로 유명하거든요."



2화에서 계속

매주 수요일, 토요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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