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워레슨을 받다니 감개무량하다.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책이 없었다. 책을 살 돈도 없었지만, 거실이자 안방이었던 방에는 책상을 둘 공간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를 낳고 동화책을 사줬을 때에는 스스로 감회가 새로웠다. 동화책이 구겨질세라 곱게 읽어주었다. 어릴 적 접해보지 못했던 동화책을 어른의 눈으로 읽어 내려갈 때의 기시감이란, 참으로 묘했다. 잠시잠깐 읽는 동화책에도 이 정도이니, 꽃에 대해서는 말해서 뭣하랴. 그냥 스크루지아저씨 그 자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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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아름답지만, 일주일 길게는 이 주일이면 전부 시들어버린다. 드라이플라워로 만들어서 집을 장식할 수도 있다지만, 풍수지리학적인 측면에서 말린 꽃은 금물이라고 한다. 괜스레 껄끄럽다. 크리스천이면서도 내 유전자에는 그 믿음이 겹겹이 남아 있는지 어느새 시든 꽃을 버리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그러니 고작 10일 정도의 사치를 위해서 2만 원 정도의 돈을 쓰다니. 그야말로 과소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합리적으로 고민한 끝에 레고꽃을 구매했다. 시들지도 않는 데다가 아이의 장난감으로도 활용될 수 있으니 딱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의 마음이 이성적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간과한 결과였다. 처음에는 집 안을 환하게 해 주면서도 풍수지리학적으로도 문제가 없는 꽃을 드디어 손안에 넣었다고 자부했다. 심지어 돈을 아낄 수 있지 않으니 일석이조, 일타쌍피였다. 그런데, 생명력이 없는 꽃에서는 아무리 꽃 모양을 하고 있던들 파릇파릇한 느낌이 없었다.
혹시 이게 장고 끝에 악수 둔다??
우리가 꽃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강렬하기도 하면서 여린 색채에서 생명력을 느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 서야 매일 물을 갈아줘야 하고, 시들면 정리해서 버려야 하는 등 번잡스러움을 견딜 수 없을 테니. 아무리 번거로운 일이 기다린들, 꽃을 받는 사람은 환하게 웃음 짓고 만다.
인간은 어찌 보면 복잡하면서도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게 만들어진 존재인지도 모른다. 작년에 남편이 생일 축하한다며 꽃을 사 왔다. 괜한 돈을 썼다며 핀잔을 주고 말았다.
“아니, 먹지도 못하는 거를 왜 사 왔어? “로 시작하여, “얼마 줬어?”로 쐐기를 박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집에는 화병도 없었다. 다이소에서 3,000원짜리 꽃병을 사 왔다. 언제 꽃을 또 사게 될지 모르는데, 참으로 필요 없는 지출이라고 생각했다. 꽃다발도 렌탈이 있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꽃을 화병에 꽂는 순간, 물을 빨아들여서인지 꽃들은 생동감을 내뿜었다. 뿌리를 잃었어도 아름다운 지조만큼은 그대로였다. 그 순간이었던 것 같다.
내가 꽃에 빠진 건.
그 이후로 기념일에는 꽃을 사서 축하했다. 받는 사람도 주는 사람도 기분이 좋았다. 그러다가 내친김에 꽃꽂이를 배우는 중이다.
빚을 빚으로 돌려 막기 하시며 자식들을 키워낸 부모님이 어느 날 집안에 활짝 핀 꽃을 보며 말씀하셨다.
“꽃은 있으면 참 좋아. 비싸서 그렇지.”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꽃이 취미가 되는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