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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두맘 Oct 31. 2019

관공서 스타일

요즘도 그래? 제발 시대에 맞게 변화 좀...

일터의 분위기는 직종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공무원이 일하는 관공서의 분위기란 어떤 것일까.


관공서 분위기라는 것을 제대로 실감한 계기는 정례직원조회였다. 매월 초 열리는 정례직원조회는, 초등학교 시절 애국조회와 매우 흡사하다. 국민의례와 애국가 제창, 유공자 표창 수여 등등 형식과 절차에 맞춘 식순이 차례로 이어진다.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자리에서 일어나고 앉는다. 단상을 향한 얼굴들에는 영혼이 없고 시장님의 당부말씀은 그 옛날 교장선생님의 훈화말씀만큼 길었다.


“…… 우리 공직자 여러분 모두가 혼을 담은 행정을 펼쳐 주실 것을 당부 드려마지 않습니다.”


아…… 내 혼은 어디에…….




나는 어느 정도의 형식과 절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형식 파괴를 주장할 만큼 혁신적인 인물은 못 된다. 문제는 형식과 절차 그 자체가 아니라, 형식과 절차가 시대의 흐름에 맞게 변화하지 못하고 과거를 답습할 때 발생한다. 변화니 혁신이니 하지 않아도 철밥통이 보장되는 공무원 사회는 아주아주 느리게 변화한다. 과거에는 의미 있는 형식과 절차였으나 오늘날은 허례허식이 된 것들을 아직도 잔뜩 끌어안고 있다.


한 번은 유공자 표창을 하는데 대상자가 좀 많았다. 50명은 넘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수많은 사람들에게 한 명 한 명 시장님이 표창장을 친수했다. 표창 내용도 똑같아서, 한두 명만 대표로 수훈하고 그 외에는 따로 전달하거나 표창장 문안을 한 번만 읽어도 될 것 같은데 사회자는 똑같은 내용의 표창장 문안을 생략하지 않고 계속 반복해 읽었다. 뒤편에 서서 행사를 지켜보던 나는 십 분이 넘게 똑같이 반복되는 멘트에 지쳐 결국 슬그머니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재미도 감동도 없이 감사 인사로만 점철된 연말 시상식 수상 소감이 떠올랐다. 물론 개개인에게는 의미 있는 일이겠지만, 여러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상을 주는 의미가 있는 자리인 만큼 지켜보는 사람 생각도 좀 하면 좋을 텐데.




이렇듯 ‘요즘도 그래?’ 싶은 일들이 시청에서는 자주 일어났다. 예를 들어 공직자 퇴임식이 그랬다. 매년 상반기와 하반기마다 정년퇴직자와 명예퇴직자를 위한 공직자 퇴임식이 열리는데, 행사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퇴직자 중에 기꺼이 참석하는 이가 드물다. 30명이 퇴직하면 대여섯 명이 겨우 참석하는 정도다. 그것도 총무과 담당자가 부탁부탁 해서 겨우 오는 거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퇴임식 자체가 너무 구닥다리다. 그 옛날 어르신들 환갑잔치처럼 퇴직 공직자 내외가 단상 앞에 도열해 앉아 있고, 퇴직자가 근무했던 부서 직원들이 몰려와서 꽃다발 주고 사진 찍고 그러는 거다.


퇴직 공직자에게 예우를 갖추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몇 명 참석하지도 않는 행사를 반기마다 준비하고 업무 시간 중에 참석하느라 낭비되는 행정력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서별로 따로 회식이나 환송회를 안 하는 것도 아니다. 왜 퇴직 당사자 대부분이 참석을 꺼리는지에 대해서도 고민이 필요하다고 본다.




공무원 특유의 딱딱하고 절차를 따지는 분위기는 비단 정례직원조회나 퇴임식 같은 행사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업무 방식을 포함하여 조직 전반에 녹아들어 있다. 이전에 하던 방식을 비판 없이 답습하고, 섣부른 문제 제기는 잘 하지 않는다.


겪어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보직이 바뀌면 업무의 큰 틀을 파악할 여유도 없이 인수인계에 급급하고, 문제 제기를 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심지어 불이익을 받을 뿐이라는 걸 보고 듣거나 직접 경험하게 된다. 단단한 담벼락에 달걀을 던지는 느낌이랄까. 그냥 전임자가 했던 대로, 상사가 하라는 대로만 하는 게 안전하다. 그래야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을 떠넘길 수도 있다.


인수인계를 받은 대로, 전임자가 하던 대로 구태의연한 인사말씀을 써 나가던 어느 날, 내 원고를 읽어본 팀장님께서 농담처럼 “너도 이제 공무원 다 돼 버렸구나”라는 말씀을 하셨다. 공무원에게 공무원이 됐다고 하는 말은 칭찬인가 욕인가. 조직에 잘 적응했다는 칭찬으로 들을 수도 있었지만 기분이 묘했다.


다시 살펴본 원고에는 행정편의주의적인 발상이 가득 담겨 있었다. 시민에게 시정에 대한 협조를 구하면서 ‘불편하시겠지만 다 우리 시를 위한 일이니 협조를 당부드립니다’라는 식이었다. 실제로 시장님이 그런 표현을 종종 쓰셨고, 전임자의 원고 속에도 비슷한 표현들이 있었다. 구태의연한 답습은 지적받지도,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눈 밝은 팀장님이 지나가듯 던진 한마디는 임용 3개월 차 신규 공무원 스스로가 달걀인지 벽인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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