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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두맘 Oct 31. 2019

시장님바라기

내 클라이언트는 시장님

연설문 담당자로서 나의 업무에는 시장님과의 소통도 포함돼 있었다. 중요한 원고를 작성할 때는 직접 시장실에 원고를 들고 가 결재를 받는다. 한 번에 오케이가 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고 보통 한두 차례 수정을 거쳐 외부로 나갈 원고가 완성된다.


원고가 영 마음에 안 드는 경우 시장님이 직접 새 글을 작성하시기도 한다. 이럴 때는 적잖이 신경이 쓰인다. 제 아무리 뛰어난 문장도 ‘클라이언트’가 싫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시장님의 말과 글을 대신 작성하는 필사로서 클라이언트의 의중을 꿰뚫지 못한 것은 성공적인 업무 수행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평소에 시장님의 스타일을 파악해두는 것이 중요했다. 시장님 인사말씀이 예정된 행사를 따라가 어떤 식으로 말씀을 하시는지 듣고 내가 쓴 원고와 비교해 보았다. 보통 책자에 실리는 글은 원고 그대로 게재되지만 현장에서의 말씀은 즉흥적으로 하실 때가 많았다. 내가 쓴 원고와 시장님의 말씀이 겹치는 부분은 어디인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시장님이 반복해서 강조하시는 내용은 무엇인지 파악했다. 특유의 말버릇이나 자주 쓰는 어휘도 체크해서 원고에 반영하면 수정 사항이 대폭 줄었다.




공무원으로 재직하는 동안 두 분의 시장님을 만났다. 첫 번째 시장님은 꼭 ‘교장선생님’ 같은 분이었다. 아랫사람의 의견을 듣기보다는 당신이 하고픈 말씀이 많은 분이었다.


“어, 어리네?”


출근 첫날, 시장실에 인사를 드리러 간 나를 본 시장님의 첫 반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전임자는 30년 이상 근무하고 정년퇴직하신 남자 분이었다. 그 자리에 새파랗게 어린 20대 여자애가 들어오자 희한하기도 하고 못미덥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 심정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기분은 별로였다. 공무원의 채용에는 나이와 성별에 따른 차별이 없(어야 한)다. 엄연히 공정한 절차를 거쳤고, 지원자 중에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기에 합격해서 임용됐다. 그런데 출근 첫날부터 그냥 ‘어린 사람’이 돼버린 거였다.


어쨌거나 시장님 스타일에 맞추려고 노력했지만 첫 만남의 불편한 느낌은 계속됐다. 결재를 받으러 가면 원고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휙 던져 무안을 주기도 하고, 전체직원조회에서 공보실에서 써온 인사말씀이 어떻다고 지적하신 적도 있다. 가끔 내가 쓴 원고를 그대로 읽으시면 마음에 드셨는가보다 하고 감지덕지했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글과 시장님이 좋다고 생각하시는 글의 기준이 달라 원고를 열심히 쓰는 게 의미가 없었다. 그저 형식을 지키고, 시장님이 좋아하시는 미사여구를 잔뜩 버무려 넣고, 욕이나 안 먹기를 바랐다.



두 번째 시장님은 완전히 달랐다. 취임을 앞두고 취임사 준비를 위해 미리 만나 뵌 시장님은 나를 무척 인간적으로 대해 주셨다. 고향은 어디냐, 학교는 어디를 나왔느냐, 시청에서 일하기 전에는 무슨 일을 했었느냐 묻기도 하시고 심지어는 담배를 피우느냐며, 같이 담배를 피우러 가자고 권하시기도 했다(!). 물론 담배가 좋은 건 아니지만, (청사 내에서는) 담배 피우는 여직원이 단 한 명도 없는 보수적인 조직에서 나를 ‘여직원’이나 ‘어린 사람’이 아니라 같이 일하는 직원의 한 사람으로서 대해주시는 게 느껴져서 좋았다.


글에 대한 안목도 높으셔서, 원고를 가지고 가면 일일이 고쳐 주셨다. 그러면서도 내가 자존심이 상하지는 않을까 배려하시는 게 느껴졌다. 시장님 손이 닿은 원고는 내가 봐도 초안보다 나아서 배울 점이 많았다.


아랫사람의 의견도 경청하시는 분이었다. 7급 이하 젊은 공직자들과 만나는 자리를 만들어 허심탄회하게 소통하시기도 했다. 여성의 날 무렵에는 여성 공직자들만 모아 따로 간담회를 갖기도 했다.


한 번은 내게 당신이 구상한 기고글에 대한 의견을 물으셨다. 어느새 공무원 2년차, 질문하는 법도 내 생각을 말하는 법도 잊어버리고 윗사람이 원하는 바에 대해 적당히 맞장구치는 데만 익숙해진 나는 “시장님께서 생각하시는 바가 잘 드러난 것 같습니다”라는 둥 아무 의미 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시장님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니, 그래서 그 생각이 어떤 것 같냐고” 재차 물으셨고 그제야 나는 솔직한 내 의견을 꺼내놓았다. 약 2년간의 공무원 생활 중에 진짜 내 생각이 궁금해서 질문하는 상사는 그 전에도 그 후에도 거의 본 적이 없다.


개인적으로는 시장님 임기 중에 퇴직을 하게 되어 아쉽고 죄송한 마음이 컸다. 권위의식 없고 소탈한 분이시기는 하지만 일개 8급 공무원에게 조직의 보스란 너무나 크고 어렵게 느껴져서, 시장님에 대한 감사나 존경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상대를 진심으로 대하고, 고마움이나 미안한 감정을 무람없이 표현하는 것 또한 시장님께 배운 바다. 시장실에 갈 때면 항상 “고마워~”라는 말로 일하는 사람의 기운을 북돋워 주셨다. 원고 검토가 늦어져 독촉(!)하러 찾아가면 “내가 좀 바빴어~ 미안해~” 하며 너털웃음을 지으셨다. 테이블 위에 놓고 드시던 견과류를 한 줌 듬뿍 집어 내 손에 쥐어주신 적도 있다.


한 번은 당일 저녁 행사 때 쓸 원고를 갑자기 요청받은 적이 있었다. 6시가 넘을 때까지 부랴부랴 원고를 작성해 넘기고 퇴근을 했는데, 현장에서 받아보신 원고가 특별히 마음에 드신 모양이었다. 수행비서를 통해 나에게 칭찬 문자를 보내 오셨다. 다음날 출근해보니 행사 담당자도 따로 전화를 걸어와 시장님께서 크게 칭찬하시더라고 전해 왔다. 그냥 그 자리에서 언급되고 끝날 수도 있는 이야기였지만, 반드시 나에게 칭찬이 전해지도록 지시를 하셔서 글 쓰는 사람의 사기를 높여 주셨다.


원고를 프린트해 책상 앞에 붙여 놓았다. 어깨가 으쓱해졌다. 상사의 인정을 받는 게 이렇게 신나는 일이구나. 전 시장님 임기 중에는 느껴보지 못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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