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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시탐탐 Oct 19. 2021

냉장고가 고장 났다.

: 엄마의 흔적이 사라지는 기분이다.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한 2일 전. 집에 들어오니 밖에서 들리는 빗소리보다 더한 소리가 냉장고에서 났다. 엄마가 쓰던 냉장고였으니 어느덧 20년도 훌쩍 넘어 가끔 자신이 아직도 건재하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 덜커덩- 덜커덩- 소리를 내곤 했던 터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도 웅장한 소리는 계속됐지만 냉장고를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이상하게 꼭 일찍 나가야 하는 날이면 눈이 안 떠져서 미적거리다 결국 시간에 쫓기며 출근 준비를 하게 된다. 부랴부랴 준비를 마치고, 나가기 5분 전. 그래도 커피는 먹어야겠다! 는 일념으로 텀블러에 커피를 담고, 냉동실에 있는 얼음 트레이를 꺼내는 순간! 촤악~ 트레이 있던 물이 그대로 쏟아졌다. 옷은 다 졌었고, 바닥은 그야말로 대참사였다.


예상치 못한 봉변에 놀라 그제야 냉동고를 보니... 켜켜이 쌓아둔 비상식량들이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아~ 나가야 한다고! 이럴 시간이 없다고ㅠㅠ'  냉장고는 자신을 봐달라며 더 소리를 냈지만, 더 지체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옷만 갈아입고, 출근을 다. 그런데 꼭 일찍 퇴근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날은 없던 일도 생긴다. 하루 종일 울고 있을 냉장고 때문에 일을 서둘렀지만 결국 평소보다 더 늦은 시간에 퇴근을 했다.  




아침보다 더한 참사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다시 괜찮아졌을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 사이를 오가며 집에 들어오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냉동고 문을 열었다. '아... 아.... 악!' 어디서부터 치워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일단 냉동고에 있는 것부터 모두 꺼내서 음식물쓰레기봉투에 담기 시작했다. 담고, 닦고, 담고, 닦고를 1시간 즈음하다 보니 냉동고가 어느새 비워졌지만... 집안에는 쿰쿰한 냄새가 가득했다.


일단 냉장고의 전원 버튼을 껐다가 다시 켰다. 전쟁 중 잠시 쉬는 시간처럼 갑자기 집안이 조용해졌다. 냉장고가 다시 아무 일 없던 듯 살아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도 이사 가기 전까지 '딱 1년만 더 버텨주지 왜 하필 지금 고장 난 거냐!'며 애먼 냉장고를 원망하기도 했다. 내 원망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냉장고는 다시 우와왕~ 큰소리를 내며 울어대기 시작했다.


결국 내일은 출근을 못하겠노라 연락을 하고, A/S센터에 예약을 했다. 부품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우와왕~ 소리가 마치 냉장고가 아직 살아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나의 10대부터 40대까지를 함께한 냉장고였다. 그동안 속 번 안 썩히고, 20년 이상을 버텨준 냉장고였다. 더운 여름이 끝나고, 갑자기 쌀쌀해지니 이제 제 할 일이 다했다는 듯 멈춰버린 냉장고였다. 바쁜 시기가 아닌 일이 마무리되어 여유 있는 지금 고장 나 버린 냉장고였다. 문득 냉장고가 정말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2시, A/S센터에서 출장기사님이 오셨다. 냉장고를 보자마자 나를 한번 쓰윽- 보셨다.

"언제부터 이랬습니까?"

"2일 전부터 갑자기..."

"더 이상 부품이 안 나오는 제품이라서 수리가 불가능합니다."

"네... 그럴 거 같았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안 되겠죠?"

"죄송한데... 볼 것도 없어요."


마지막 희망도 역시나였다. 출장 기사님은 코드를 꽂아놓으면 전기세가 나간다며 코드를 뽑으려고 하셨다.

나는 기사님의 팔을 붙잡았다. "제가.... 제가 뽑을게요."

대참사가 나서 이미 닦고, 닦은 냉장고였지만... 더 정성 들여 냉장고 구석구석을 다시 닦았다. 이젠 닦아도 별로 티가 나지 않는... 곳곳에 상처와 오래된 흔적이 가득한 냉장고를 이젠 진짜 보내줘야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게 너무 당연해서, 익숙해서 몰랐다. 고장이 나고 나서야, 더 이상 못쓰게 되고 나서야 '냉장고의 소중함'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물론 새 냉장고를 사면 더 이상 덜커덩- 하는 소리도... 우와왕~하는 이상한 소리도 나지 않을 테고, 닦아도 닦아도 티 나지 않던 것과는 달리 반짝반짝할 거다.


평생 같이 있을 수는 없기에 언젠가는 떠나보낼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는 아니었다. 더 아끼면서 쓸걸... 후회해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제 더 이상 이 냉장고와는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되새길수록 이렇게 마음 한 구석이 아린 건... 아마도 이 냉장고가 나한테는 그냥 냉장고가 아니라 엄마가 사용하던 물건이었기 때문이겠지... 냉장고가 사라지는 것은 엄마의 흔적이 사라지는 기분이다. 흔적이 사라진다고 해서 엄마가 잊혀지는 건 아니지만 마음 한구석이 찡하다. 문득, 엄마가 많이 보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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