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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도 Apr 28. 2024

시험기간에도 여유를 잃지 않지


유럽 친구들의 몸에 밴 여유는 시험기간에 빛을 발한다. 오전 10시면 빈자리 하나 없이 도서관이 꽉 차지만, 오후 4시 정도가 되기 시작하면 하나둘 기지개를 켜며 슬슬 짐을 챙겨 하나 둘 자리를 떠난다. 6시가 되면 벌써 40퍼센트는 자리를 정리하고 집에 가버린다.


얼마 전에 만난 그리스 친구는 요즘 기말고사 공부로 너무너무 바쁘다면서 호들갑을 떨더니, 요즘 얼마나 공부량이 많은지 지난주에는 오전 9시에 도서관에 와서 오후 6시까지 풀타입으로 공부했다고 자랑을 했다. 한국에서는 시험기간이 되면 밤 11시-12시까지 도서관에 남아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던 (나는 그렇게까지 하지는 못했지만) 나로서는 이런 유럽아이들의 기준의 ‘엄청난 빡셈'이 신기하고 재밌다.


얼마나 늦게까지 하느냐의 기준도 다르지만, 중간중간 여유롭게 휴식을 취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도 신기하다. 카페에서 공부를 하던 내 옆자리의 친구는 한참 공부를 하다가 수도쿠에 또 한참 열중한다. 그렇게 한 시간이 훌쩍 흘러버렸는데도 별로 상관하지 않는 얼굴이다. 도서관에서 같이 과제를 하던 한 스페인 친구는 바람을 좀 쉬어야겠다며, 갑자기 근처에 등산을 하러 갔다. 그리고 그렇게 중간에 놀고 딴짓하는 것에 자책하는 법이 없다. 그건 인간으로서 당연하고 필요한 거라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너그러울 줄 아는 여유로운 모습에 감동했다.


… 그나저나 다른 사람들 구경하고 이럴게 아니라 나도 공부 좀 해야 하는데. (한숨)


등산으로 시작하는 하루

어제 감기약을 먹고 자서인지 꽤나 숙면을 했고 (머리는 좀 멍하지만), 7시에 일어나서 집 근처 뒷산으로 하이킹을 갔다. 하이킹은 언제나 좋다. 바람이 시원해서 머리가 맑아지고, 적당한 산을 오르면서 몸이 단단해지는 느낌이 든다.


문득 이곳에 살게 된 지도 8개월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훨씬 오래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그리고 앞으로 더 이렇게 학생으로 살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다가, 얼른 다시 경제적 활동을 하고 제 몫을 하고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남은 시간 동안 앞으로 어떤 학교 생활을 하게 될까.


오늘 읽고 있는 스웨인의 논문이 굉장히 재밌다. 언어가 지각의 에이전트가 된다는 것, 그리고 노화라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도구로서의 언어. 흥미로운 주제이다. 왜냐면 우리는 이제 먹고 사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노동이라는 구조에서 벗어났을 때 우리가 어떻게 허무하지 않게, 행복감을 느끼며 살 수 있을까에 대해서 생각해야 할 시대가 왔으니까.


더 이상 미룰 수 없어서 꾸역꾸역 과제를 하는 하루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자의 화요일이라서 아침부터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도 그가 가이드라인을 잡아주어서 방향성이 조금 잡혔다.


맞는 답이 있다고 생각하고 내가 지금 하는 것이 틀렸나 아닌가에 집착하다 보니 부담감이 커서 시작이 안 되는 느낌이었다. 맞는 답을 쓰고 있나 보다는 내가 아는 것의 한계 내에서 써내겠다는 마음으로 우선 써 내려가자고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교수님의 지적은 나중에 걱정할 문제다. 어쨌거나 이걸 한번 하고 나면 좀 더 쉬워질 것이다.


오늘 할 일을 다 끝내면 저녁에 나에게 새우깡을 하사하겠다.


이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펍

금요일 오후 5시, 오늘 해야 할 만큼의 에세이를 끝마치지 못했지만 염치도 없게도 내 머리는 더 이상 근무하기를 거부했다. 어쩔 수 없이 (?) 내 다리는 도서관 근처의 펍으로 향하고 있었다.


주문을 하려고 기다리는데 (영국 펍에서는 테이블에서 주문을 받아주는 게 아니고, 바에 가서 직접 주문을 해야 한다) 바 테이블에 혼자 앉아서 기네스를 마시던 할아버지가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젊은 친구는 어디서 왔나요? 하길래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아이고, 멀리서 왔네. 멀리서 온 사람이 운이 좋아, 이 펍에 왔다는 게. 이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가장 인심이 좋은 펍이거든.”라고 말을 트고서 우리는 이런저런 잡담을 시작했다 (그리고 확실히 인심이 좋은 펍이었다. 레드 와인을 한잔 시켰는데 아주 넉넉히 따라주셨다!). 이 동네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 할아버지가 어떻게 웨일스에서 에든버러에 왔는지, 이 도시에서 지낸 지난 55년이 어땠는지, 매일 저녁 이곳에서 기네스 한잔을 마시는 할아버지의 루틴에 대한 이야기 등등.


스코틀랜드의 펍은 매번 이런 경험이었다. 나이나 직업, 어느 나라 사람인지에 상관없이 누군가와 쉽게 말을 섞고 친근하고 편안한 대화를 나누는 것.


바텐더가, 아니라면 (아마도 매일 이곳에 출석하는 듯한) 옆자리에 앉은 누군가가 나의 하루는 어땠는지 넌지시 물어본다. 시원한 술 한잔과 타인의 작은 관심과 가벼운 대화로 나는 오늘 쌓인 마음의 짐을 잠시 잊는다.


앞으로 이 펍에 자주 오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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