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부부의 경제적 자립기]
(지난 편에 이어서)
2023년은 유독 많은 변화가 있었던 해였다. 봄에는 아내가 광고 업계의 다른 회사로 이직했고, 그 무렵부터 주말마다 우리는 서울과 수도권 지역의 부동산 임장을 다녔다. 몇 주에 걸친 검토 끝에 여름엔 아내 명의로 생애 첫 아파트를 매입했다.
나는 새로 이직한 회사에서 과장으로 직급이 올랐고, 그에 따라 대외 홍보 업무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일은 늘었지만, 커리어에 있어서는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시기였다. 아내 역시 새 직장에서 빠르게 적응하며 업무를 익혀갔다. 각자 맡은 위치에서 몰입하는 하루하루였고, 이제 우리도 꽤 단단한 구조 안에서 살아가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우리는 각각 1주택자가 되었고, 소득도 꾸준히 늘고 있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 의문점은 해결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정말 우리가 원하는 경제적 자립에 도달할 수 있을까?
내가 가진 불안감을 파헤쳐 보면 결국 '현금흐름'의 부재였다. 우리 부부의 자산은 늘어가고 있지만, 우리의 실질적인 현금흐름은 전적으로 근로소득만에 기대고 있었다. 자산을 늘리는 것만이 경제적 자립을 뜻하지는 않다는 단순한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나의 관심사를 알고 있던 친한 친구가 책 한 권을 추천했다.《이것은 빠른 경제적 자유를 위한 책》이라는 직설적인 제목의 책이었다. 제목만큼이나 내용도 실용적이고 직접적이었다. 작가가 제공한 엑셀 파일이 특히 좋았다. 각자의 나이와 목표 시점, 기대 수익률, 연 생활비 등을 입력하면 자산의 추이를 시뮬레이션해 볼 수 있도록 수식값이 입력이 되어 있었다. 구체적인 방법을 발견했을 때, 목표는 더욱 구체화되는 법이다.
우리 부부에게 필요한 연간 생활비는?
이 간단한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자료와 고민이 필요했다. 우선 우리 부부의 1년 치 생활비 내역을 카테고리별로 정리했다. 여당과 야당이 한 가지 법안을 갖고 대립하듯, 우리는 각 항목별로 창과 방패가 되어 대화를 했다. 처음에는 매우 보수적인 기준의 생활비가 산출되었다.
그 내역을 살펴보던 아내는 단호히 말했다.
경제적 자립 이후에는
조금 더 여유로운 삶을 살고 싶어
아내의 의견을 반영해 생활비에 미용과 개인용돈, 건강관리, 해외여행을 위한 비용을 추가했다. 주거비에 대한 관점도 달랐다. 내가 수립한 월 주거비를 보더니 아내는 고개를 저었다. 본인 명의의 아파트를 처음 갖게 된 아내는 좋은 주거환경에 대한 기준이 조금 더 높아져 있었다.
다만 나 또한 아내의 의견대로 모든 비용을 늘릴 수는 없었다. 조율이 필요했다. 네이버부동산 앱을 켜고 내가 설정한 예산으로 임대할 수 있는 아파트와 주거용 오피스텔 후보군을 쭉 브리핑해 주었다. 생각보다 쾌적하면서도 저렴한 임대주택들도 있었고, 다양한 선택지 속에서 ‘적당히 만족스러운 삶’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경기도 동탄, 광교, 광주, 하남 등 충분히 좋은 입지에 위치한 준신축 거주지가 많았다. 이에 아내는 안심을 할 수 있었다.
이렇듯 생활비의 각 카테고리에 대한 많은 대화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삶과 이에 필요한 예산을 수립할 수 있었다. 현재 우리의 생활비에 더해 은퇴 이후 국민연금, 재산세, 건강보험료, 경조사 비용, 실비 보험료 등은 개별적으로 항목에 추가해야 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 부부만의 '경제적 자립'에 대한 기준을 수립할 수 있었다. 우리의 연 생활비 기준이 명확해지자 그다음 단계들이 자연스럽게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싶을까?
그 질문은 생활비 표에서 시작됐지만, 어느새 삶의 설계까지 닿아 있었다. 주거비를 이야기하다 보면 우리가 살고 싶은 동네가 그려졌고, 식비와 여가비를 정리하다 보면 우리가 유지하고 싶은 생활의 결이 드러났다. 아내는 자신이 어떤 화장품을 꾸준히 쓰는지, 어떤 건강 관리 루틴이 자신에게 꼭 필요한지 차근히 이야기했다. 나는 아내가 어떤 것들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세세히 알게 됐다. 이전에는 단순히 '합리적 소비'라는 이름으로 묶어버렸던 항목들이, 아내의 행복을 지탱해 주는 중요한 요소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결국, 현금흐름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가 어떤 속도로 살고 싶은지, 무엇에 돈을 쓰고, 무엇을 지키며 살고 싶은지, 그리고 그걸 누구와 함께 누리고 싶은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과정을 거치며 우리는 처음으로 '우리 부부가 만족할 수 있는 삶의 기준'이라는 걸 정립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연 생활비 총액이 정해지고 나니, 이후의 단계들은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이 생활비를 안정적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이전까지는 ‘자산을 얼마나 불릴 수 있을까’라는 관점이었다면, 이제는 ‘이 자산이 어떻게 흐르게 만들 것인가’가 핵심이 되었다.
현재의 순자산과 경제적 자립을 달성했을 때의 순자산, 그리고 이 순자산을 통해 만들어 나갈 수 있는 현금흐름이 가장 중요한 축이었다.
보수적으로 국내 연평균 물가상승률을 3%로 잡았다. 투자 수익률을 연평균 7.5%로 잡았을 때, 아내의 나이 100살, 내 나이 108살까지,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생활비가 나오기 위한 순자산 목표가 구체화되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아내와 나의 현실적인 근로 기간을 2028년까지로 산출되었다.
*소비자물가지수의 과거 20년 간 상승률은 2.38%, 10년간 상승률은 1.88%였다.
우리의 목표 순자산, 목표 자립 연도, 연간 생활비와 이에 수반한 세금 등 모든 것이 조금씩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경제적 자립이라는 목표가 더욱 명확해지자 우리의 회사 생활에 대한 관점 조금씩 변화해 갔다.
(시리즈는 매주 수요일에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