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희귀암 환자생활
모든 일에는 일장일단이 있듯이 암환자가 된 게 꼭 어두운 면만 있는 건 아니다. 이전에는 여유 시간이 있어도 남보다 뒤처지진 않을까 불안한 마음에 가만히 쉬지 못했는데, 육종암 진단을 받은 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고 마음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달려오던 삶에서 벗어나 천천히 쉬어가는 삶을 병으로부터 선물 받았다.
몸이 아프기 전에는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느라 정작 현재를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나중을 생각했을 때 지금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지 아니면 다른 길을 모색해 봐야 하는 건지 고민이 끊이지 않았다. 계속되는 저울질은 되레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키웠고 마음을 시커멓게 만들었다.
이후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암에 걸리고 나서 깨달았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기 때문에 앞날을 멀리 내다보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걸. 내가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미래는 오지 않을 수도 있기에 지금 발을 딛고 있는 현재에 집중하고 충실해야 한다는 걸. 마음속에 미래의 불안을 덜고 현재의 감사함을 채우니 삶이 풍요로워졌다.
병을 통해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다’는 사실을 상기함으로써 삶의 가치를 인식하게 되기도 했다.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고 나니 작은 일에도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예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나무와 꽃들을 지금은 자세히 관찰하며 그 푸르름과 알록달록한 빛깔에 감탄한다. 일상 곳곳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눈을 지니게 되면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 많아졌다.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주저하지 않고 바로 실천하는 추진력도 갖게 되었다. 과거에는 악기 배우기나 여행 가기 등 하고 싶은 게 생겨도 ‘언젠가 해야지’하며 미루는 습관이 있었다. 그렇게 미루다 보면 결국 생각만 하고 행동으로는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암환자가 된 후 시간의 한정성을 인지하면서 ‘언젠가’를 ‘지금’으로 바꾸게 되었다. 이제는 배우고 싶은 게 생기면 바로 동네 학원을 알아보고 전화를 걸어 수업 시간을 문의한다.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바로 차를 타고 멀리 여행을 떠난다. 실행력이 높아지다 보니 경험하는 것들이 많아졌고, 좋아하는 일로 시간을 채울 수 있게 되었다.
간혹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올 때면 누구나 시한부 인생을 산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건강한 사람도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암환자라고 특별히 겁낼 건 없다며 스스로를 위안한다. 내게 남은 생은 축구로 치면 정규 시간이 끝나고 주어지는 추가 시간과 같다. 보너스로 얻은 삶이기에 하루하루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간다. 아침에 눈을 뜨고 세상을 경험하는 매일이 기적이다.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면 부상으로 벤치에 있던 강백호가 경기 막판 팀이 위기에 몰리자 자신을 코트에서 뛰게 해 달라며 안 감독에게 이런 말을 한다.
“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난 바로 지금입니다.”
강백호의 대사를 듣고 나서 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일까 떠올려 봤다. 재수 끝에 가고 싶었던 대학교에 합격했을 때일까 아니면 꿈꾸던 스포츠 기자가 되었을 때일까. 어쩌면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이 나의 진정한 영광의 시대일지도 모르겠다. 병마와 싸우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버텨내며 삶의 즐거움을 찾아가는 현재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하게 빛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