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 인내, 기다림 끝에 만난 오로라

노르웨이에서 오로라를 보고 얻은 깨달음

by 라노

많은 여행자들이 버킷리스트 중 하나로 ‘오로라 보기’를 꼽는다. 나 역시도 오로라를 꼭 한 번 보고 싶었지만 거리가 멀고 날씨가 추운 북유럽을 가야 하는 게 마음에 걸려 선뜻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슬란드를 다녀온 친구가 직접 찍은 오로라 사진을 보여줬고, 사진 속 신비로운 초록빛에 매료된 나는 미루고만 있었던 북유럽 여행을 당장 하기로 결심했다.


오로라 관측에 성공할 확률이 높은 지역을 알아본 다음 노르웨이 북부에 있는 도시 트롬쇠를 최종 행선지로 정했다. 북위 69도에 위치한 트롬쇠에 방문하면 북극권 도달 증명서를 받을 수 있고, 세계 최북단의 맥도날드를 가볼 수 있다는 점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인천과 트롬쇠를 잇는 직항 노선은 없어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경유한 뒤 덴마크 코펜하겐에 2박 3일간 머물다가 트롬쇠에 가기로 했다.


한국을 떠난 지 사흘 만에 만난 트롬쇠는 현실에 존재하는 겨울왕국 같았다. 차가 다니는 도로는 물론 산자락과 건물 지붕에도 눈이 수북이 쌓여 새하얀 설경을 이뤘기 때문. 2월의 트롬쇠는 거의 매일 눈이 온다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었다. 저녁에 오로라 투어를 가기 전 관광 안내소를 찾아가 북극권 도달 증명서를 받고, 맥도날드에 가서 ‘세계 최북단에 있는 맥도날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문구를 읽어내렸다. 오로라를 보기 위해 아주 먼 곳까지 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20250217_140707.jpg 노르웨이 트롬쇠 시내의 설경

어느덧 다가온 오로라 투어 미팅 시간. 호텔 방에 부랴부랴 들어가 한국에서 사온 방한복을 무더기로 꺼냈다. 평소에는 갑갑한 게 싫어서 옷을 가볍게 입는 편이지만, 투어 후기 중에 춥다는 글이 많아 옷을 두툼하게 껴입을 생각이었다. 상의는 히트텍 두 벌, 니트 티, 양털 점퍼, 패딩을 차례로 입고 하의는 기모 스타킹, 기모 바지에 울 양말을 신는다. 여기에 넥워머와 모자를 착용하고 패딩 주머니에 핫팩 3개를 넣으며 매서운 추위에 맞설 준비를 모두 마쳤다.


호텔 정문 앞에는 오로라 투어 버스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내가 예약한 투어 업체의 이름을 찾아 미니버스에 올라타자 푸근한 할아버지 인상의 가이드가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각국에서 모인 여행객들로 버스 안이 꽉 차자 가이드는 간단히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망네입니다. 낮에는 운전 일을, 밤에는 투어 가이드를 하고 있어요.”

잠시 숨을 고른 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은 구름이 많아서 오로라를 보는 게 어려울 수도 있어요.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니 일단 가봅시다!”


망네의 말을 듣고 오로라를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은 조금 내려놓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로라 예보 앱을 켜고 지속적으로 오로라 지수를 확인했다. 버스는 오로라 스팟을 찾아 시내에서 먼 서쪽으로 향했는데, 어둠 속 눈길을 헤치며 한참을 달린 뒤에야 비로소 멈춰섰다. 먼저 버스에서 내린 망네는 손을 들고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오로라가 보이네요.”

그의 손짓을 따라 고개를 돌린 곳에는 가늘고 기다란 흰색 띠 모양이 있었다. 설마 저게 오로라인가 싶어 사진을 찍어보니 신기하게도 사진에는 흰색 띠가 초록색으로 나온다. 오로라가 약하면 육안으로는 흰색으로 보인다던 사람들의 후기가 그제야 이해되는 한편, 초록색 오로라를 두 눈으로 보지 못한 아쉬움이 크게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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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오로라(왼), 추위 속에서 오로라를 기다리는 여행객들(오)

망네는 일단 이곳에 자리를 잡고 강한 오로라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보자고 했다. 그러면서 모닥불을 피우고 여행객들에게 핫초코와 마시멜로를 나눠 주었다. 추위에 발이 시렸던 나는 모닥불 앞에 앉아 언 발을 녹인 뒤 마시멜로에 꼬치를 꽂아 구워 먹었다. 한 시간 가까이 캠프파이어를 하는 동안 하늘에는 별만 반짝일 뿐 오로라는 감감무소식이다. 선명한 초록빛의 오로라는 결국 보지 못하는 건가. 마음이 급해진 나는 망네에게 넌지시 물었다.

“오늘은 더 이상 오로라를 볼 수 없는 건가요?”

“좀 더 기다려보죠. 오로라를 보려면 많은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말처럼 구름이 걷히더니 오로라가 하늘을 물들인다. 맨눈으로 봐도 초록색인 걸 보니 강렬한 오로라가 분명했다. 밤하늘에 번지는 초록빛의 향연은 충격적일 만큼 아름다웠다. 비록 한순간 머물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지만 여운만큼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20250216_230606.jpg 마침내 나타난 오로라

우리는 장소를 옮겨 또 다른 오로라를 찾아 나섰다. 밤 11시쯤 눈보라를 뚫고 다다른 곳은 트롬쇠에서 60km가량 떨어진 소마로이 섬. 버스에서 하차해 하늘을 살펴보던 망네가 다급하게 외쳤다.

“얼른 내려서 저기 좀 보세요!”

망네의 말을 듣고 버스에서 뛰쳐나와 고개를 드니 흰빛과 초록빛이 섞인 오로라가 가로로 넓게 커튼처럼 늘어져 있다. 잠시 후 오로라는 바람을 타듯 오른쪽으로 빠르게 움직이며 춤을 췄다. 말로만 듣던 ‘댄싱 오로라’가 눈앞에 펼쳐진 것.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하늘을 유영하는 초록 물결에 나는 “오!”, “어머!”, “우와!”하며 탄성을 질렀고, 다른 여행객들은 각국의 언어로 감탄을 쏟아냈다. 망네는 그런 우리를 보고 뿌듯한 기색으로 웃으며 말했다.

“오로라를 못 보고 가는 분들도 있는데 여러분은 운이 정말 좋네요! 너무 멋진 밤이에요.”


오로라 투어를 끝내고 호텔로 복귀한 시각은 새벽 1시였다. 짧은 빛의 기적을 만나기 위해 장장 6시간을 돌아다니는 일정을 소화했지만 피곤함보다 벅차는 마음이 더 컸다. 마치 ‘오로라 중독’에 걸린 듯 자연이 선사한 황홀함에서 쉽게 빠져 나오지 못했다. 결국 나는 이튿날 저녁에도 오로라 투어에 나섰다. 냉기가 감도는 공기 속에서 긴 기다림 끝에 북극광을 마주했는데, 피아노 건반이 차례로 눌리듯 리듬을 타는 초록빛 연주에 물개 박수가 절로 나왔다.

DSC00112.JPG 오로라 투어 둘째 날 본 오로라
DSC04848.JPG 오로라 투어 둘째 날 본 오로라

오로라 투어를 두 차례 하면서 깨달은 건 현재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해서 영원히 나쁘라는 법은 없다는 것. 당장은 춥고 눈보라가 몰아쳐도 시간이 지나면 짠하고 나타나는 오로라처럼, 숱한 어려움이 닥쳐도 묵묵히 시간을 버티다 보면 언젠가 찬란한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투병으로 인고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나에게도 시간이 흐르면 기적 같은 순간이 찾아올 거라는 희망이 생긴다. 곧 반짝이는 오로라가 찾아올지 모르니 구름이 걷히고 눈보라가 그칠 때까지 꿋꿋이 견뎌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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