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에 한 번 LP를 사러 갑니다

LP 턴테이블 구매 후 생긴 변화

by 라노

작년 1월, 부모님과 함께 살다가 언니와 단둘이 살 집으로 이사를 갔다. 새 집의 안방은 언니가, 작은 방 2개는 내가 쓰기로 했다. 나는 2개의 방을 각각 침실과 작업실로 만들었다. 둘 중 인테리어에 특히 신경을 쓴 건 처음 갖게 된 작업실이었다. 용인 가구 단지에 가서 마음에 드는 책장과 북타워를 사고, 백화점 매장에 가서 마샬 블루투스 스피커를 구입하는 등 열심히 발품을 팔아 나만의 작업 공간을 꾸몄다.


공들인 작업실 인테리어에 마침표를 찍은 건 LP 턴테이블이었다. 레트로 열풍으로 젊은 층 사이에서 인기가 좋은 LP에 평소 관심이 많았는데, 안동의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LP 턴테이블로 음악을 듣고 나서 그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이후 집으로 돌아와 작업실을 훑어보며 ‘여기에 LP를 놓으면 딱이겠다’ 생각했고, 본격적으로 턴테이블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감성 인테리어 소품으로 많이들 구매하는 가방형 턴테이블을 사려고 했다. 가격도 10~20만원대로 저렴한 편이고 디자인도 아기자기해서 예뻤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방형 턴테이블은 스피커 일체형이라 음질이 좋지 않고 금방 고장이 난다는 평가가 많았다. 사용자 후기를 살펴본 후 가격이 조금 나가도 제대로 된 장비를 사야겠다 결심했고, 여러 선택지를 고민한 끝에 데논 DP-400을 60만원에 구입했다.


작업실에 데논 턴테이블을 들이고 나서 집에 있는 LP 음반을 꺼내 들었다. 책장에만 박혀 있던 찰리 푸스의 정규 1집과 라우브의 컴필레이션 앨범이 베일을 벗는 순간이었다. 턴테이블에 LP판을 올려놓고 바늘을 내리자 ‘치지직’하는 소리가 나더니 곧이어 음악이 흘러나온다. 아날로그 방식이 만들어 낸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운드는 공간에 분위기를 입혔다. 간혹 들리는 미세한 잡음마저도 감성을 일깨웠다.


LP 한 면에는 보통 4곡 정도가 들어 있는데, 모든 곡의 재생이 끝나면 턴테이블이 자동으로 작동을 멈춘다. 그래서 노래 한 곡 한 곡이 소중하다. 끊긴 음악을 다시 틀려면 LP판을 뒤집거나 새로운 LP를 꺼내야 하는데, 이를 위해 20분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턴테이블로 향한다. 손이 많이 가서 번거로울 때도 있지만, 오래 앉아 있는 것을 피하고 몸을 움직일 수 있어 ‘오히려 좋다’고 생각한다.

KakaoTalk_20251108_231310202.jpg 라우브의 컴필레이션 앨범 LP

디지털 음원과 비교했을 때 LP의 가장 큰 매력은 음악을 들을 때 시각적 즐거움이 동반된다는 것이다. 예술 작품을 연상시키는 앨범 커버와 다양한 색상의 LP판은 보는 재미를 더해 음악을 눈과 귀로 한층 풍성하게 즐길 수 있게 만든다. 무형의 음악을 물리적 형태로 소장할 수 있다는 것 또한 LP의 장점이다. LP를 통해 음악은 단순히 듣는 경험을 넘어 소유하는 기쁨으로 확장된다.


LP를 구매할 때는 온라인으로 편하게 사는 것보다 레코드샵에 직접 가서 사는 것을 선호한다. 매장에 진열된 수많은 LP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는 경험인데다, 음반을 하나하나 손으로 넘기다 보면 원하는 LP는 물론 희귀한 명반을 건질 수도 있다. 레코드샵마다 메인으로 취급하는 장르 및 아티스트가 다르고, LP를 늘어놓는 방식이 제각각인 것도 흥미로워 여러 매장을 다니게 된다.

KakaoTalk_20251108_230810307.jpg 영화 <괴물> OST LP

LP 수집을 하면서 생긴 루틴이 몇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영화를 보고 나서 그 영화의 OST 앨범을 LP로 사는 것이다. OST를 들으면 영화 속 장면과 함께 당시 내가 느꼈던 감정들이 되살아나 영화의 여운을 오래 곱씹을 수 있다. 둘째는 계절이 바뀌면 새로운 계절의 분위기에 맞는 앨범을 사는 것이다. 여름에는 잔나비의 곡 ‘초록을 거머쥔 우리는’이 담긴 올리브그린색 LP를, 겨울에는 머라이어 캐리의 캐럴이 담긴 빨간색 LP를 들으며 계절의 감성을 즐긴다. 여행을 갈 때는 현지에 있는 레코드샵에 들러 여행지와 관련된 LP를 구입하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앨범을, 미국 LA에서는 영화 <라라랜드>의 OST 앨범을 장만하는 식이다.


3주에 한 번 항암주사를 맞으러 대학병원에 갈 때도 근처 레코드샵을 방문해 LP를 구매한다. 병원에 가야 하는 암환자의 침울한 하루를, LP를 사러 가는 수집가의 기분 좋은 하루로 덮어버리는 제 나름대로의 전략적인 루틴이다. 덕분에 항암치료 날이 다가오면 주삿바늘을 꽂을 때의 아픔을 걱정했던 예전과 달리 어떤 LP를 사게 될까 두근거리는 마음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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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업실에 자리한 LP 한 장 한 장은 이제 음악 그 이상의 것을 담고 있다. 영화를 보고 느낀 감동, 계절을 만끽한 순간, 즐거웠던 여행의 기억, 그리고 항암치료를 받으며 잘 버텨낸 날들이 각색의 원반으로 쌓여 있다. 그동안 모은 LP를 눈으로 보고 손끝으로 만지며 삶의 궤적을 되짚어본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어떤 형태로든 나의 흔적을 남기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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