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 01: 주제 = A > B

주제 = A > B

by 이기원

작가 지망생이던 시절의 일이다.

과제물로 시놉시스를 제출하는 날이었는데, 동료 수강생이 낸 시놉시스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녀는 근대문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유명한 소설가의 외손녀였기에 나는 그녀가 과연 어떤 시놉시스를 낼지 기대를 하고 있었다.


시놉시스는 그때나 지금이나 보통 제목, 주제, 기획의도, 등장인물, 줄거리 순으로 정리해서 제출하게 된다. 나는 그녀의 시놉시스에서 다른 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데, 유독 주제만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뇌리에 선하다. 그만큼 그녀가 주제란에 쓴 한 줄의 문장은 충격적이었다.


주제 : 그런 거 없다.


나는 그때 ‘멘붕’에 빠졌었는데, 그 이유는 주제가 없는 것인지, 주제가 ‘그런 거 없다’인지 헛갈렸기 때문이었다(대문호의 핏줄이라고 해서 꼭 글을 잘 쓰란 법은 없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그때 그녀는 솔직 담백하면서도 용감한 학생이었던 것 같다. 대부분의 습작생들(심지어 프로 작가도)이 주제가 없거나 모호한 작품을 쓰면서도 주제란에는 뭔가 거창한 문장을 쓰려고 고민하지 않는가. 그런데 그녀는 진솔하게 자신의 작품에 주제가 없다는 것을 고백한 것이 아닌가 싶다. 어쩌면 주제를 작품 속에서 찾지 못했을 지도 모르고.


주제라는 게 대체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 쉽다. 주제는 누구나 알고 있듯 ‘작가가 작품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작품을 통해 자신이 의도한 주제를 제대로 드러내는 작가들은 솔직히 프로 작가들 중에서도 그리 많지 않다. 그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작법적 측면에서 보면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을 몰라서 그런 것일 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대다수의 작법 책이 도입부에 하나의 챕터를 ‘주제’에 대해 할애하고 있지만, 거의 ‘주제’를 정의하는데 만족하고 있을 뿐 주제를 어떻게 구현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고 있다. 그 책의 저자들은 작품을 쓰면서 주제는 저절로 구현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게 아닐까 라고 나는 추측한다.


‘주제라는 것은 과연 어떤 식으로 구현해야 하나요?’


이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져보고 모르겠으면, 지금 수업을 듣고 있는 선생님 또는 작가들에게 한번 해보라.


아마 이런 무책임하면서도 부적절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까?


“좋은 질문이에요. 그것은 작가가 평생을 통해 해결해 나가야 하는 과제입니다. 열심히 쓰다 보면 언젠간 자기만의 방식을 터득하게 거예요.”


아니, 언젠가 알게 될 거면 왜 굳이 책을 사고, 수업을 듣나요? 지금 당장 알고 싶어서 비용을 지불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나는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알려준다. 그것도 공식으로 머리에 팍 박히게.


주제 = A > B


이게 뭐지? 황당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 황당함 때문에 이기원이 ‘주제 = A > B’라고 말했다고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잊지 않고 기억해 주리라 믿는다(내가 대문호의 외손녀가 쓴 주제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듯이).


풀어 얘기하자면, ‘주제는 A가 B보다 낫다’라는 식으로 구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낫다’는 보다 더 좋거나 앞서 있다는 뜻인데, 숭고하다, 소중하다, 가치 있다, 행복하다 등으로 의역이 가능하다.


권선징악이라는 주제가 있다. 이것은 ‘선이 악보다 낫다’이다. 즉, 선이 악을 무찌르는 식으로 주제가 구현된다.


'형제는 용감했다'류의 스토리들이 있다. 이런 스토리의 주제는 보통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고 쓰는데, 이것 역시 결국 'A가 B보다 낫다'인 것이다.


어느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과 돈 많은 사람 중에서 갈등하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스토리라면, 당연히 주제는 ‘사랑이 돈보다 소중하다’가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시놉시스상에는 ‘세상에서 사랑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라고 주제를 써도 된다. 하지만 작가의 머릿속에는 사랑이 소중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돈을 비교 대상으로 쓰겠다는 계획이 있어야 한다.


라이벌 간의 대결 스토리에서는 보통 '힘들지만 정정당당하게 얻은 승리가 손쉽고 비겁한 승리보다 낫다'는 식으로 주제를 구현한다. 그런데 주인공이 승리를 포기하거나 일부러 지는 식으로 끝나는 스토리도 있다. 이런 스토리의 주제는 어떻게 될까? 당연히 주제는 같다. 다만, 이번엔 주인공이 손쉽고 비겁한 승리를 하는 스토리로 전개되지만, 주인공이 그런 승리를 포기하거나 거부함으로써 정당한 승리가 더 낫다는 메시지를 주게 된다.


복수극의 주제를 알아보자.


복수극, 그중에서도 유혈이 낭자한 복수극의 주제는 대체로 '복수를 하지 않음으로써 일신의 안녕을 꾀하는 것보다 이 한 몸 부서지더라도 복수를 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 더 낫다'이다. 때문에 주인공은 스토리 속에서 정신적으로 무척 힘든 상황에서 복수를 결심하고 육체를 갈고닦는 것이고, 결국엔 죽음을 무릅쓰고 복수에 나서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화 <글레디에이터>의 주제이기도 하다. 주인공 막시무스는 검투사로서 인기를 구가하면서 잘 살 수도 있었지만, 굳이 자신을 위험 속에 내던져 복수를 하고 끝내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가.


다음을 보자.


진정한 사랑은 죽음을 초월한다.


주제로서 정말 멋진 말이다. 명작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제이다.


이 주제를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구현했는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죽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 없이 혼자 사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주제를 구현했다. 로미오가 줄리엣의 시신 앞에서 괜히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생명이 소중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스토리를 따라가다 보면 로미오의 극단적인 선택에서 죽음이 더 숭고할 수 있다는 주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주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미사여구나 통찰이 들어간 문장으로 표현된 주제는, 남들에게 보여주거나 말할 때나 고민하는 것이다. 작가의 마음속에서 주제는 A가 B보다 낫다는 공식으로 들어 있어야 작품을 완성해 나가는 데 있어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또한 그래야만 작품을 완성하고 나서 자신의 작품을 검증할 수 있다. 내가 과연 A가 B보다 낫다는 것을 스토리를 통해 잘 구현해 냈는가 하고 말이다.


이렇듯 주제를 공식 '주제 = A > B'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유용하다.


왜냐하면, 주제를 아는 것은 작가 자신이 어떤 스토리를 쓰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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