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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섭 Feb 24. 2023

퇴사자의 잠 못 드는 밤

퇴사인 힐링캠프_수면처방

한번 퇴사자는 언제까지 퇴사자일까. '딩동', 물론 새 직장을 잡을 때까지다. 하지만 재취업할 생각이 없다면? 셈법이 좀 복잡해진다. 직업이 있어도 여전히 퇴사자일 수 있어서다. 이전에 좋은 직장을 다녔다면 그 상실감은 더 크고 오래간다. 이럴 경우 퇴사자라는 꼬리표는 언제쯤 뗄 수 있을까. 우선 육체적으로는, 누구나 당연히 생각하는 일 못 하는 나이가 됐을 때다. 법적 정년인 60세를 넘어 70세쯤은 되어야 아마 '명함'을 내밀어 볼 듯하다. 팍팍한 살림에 실제 은퇴 연령이 자꾸 늦춰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쯤 되면 변변찮은 직장이 없어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바람직한 직업 생활을 찾아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저 굻어죽지 않을 약간의 돈과 가족의 노후대책, 적당한 품위 유지다면 괜찮다. 이 정도면 사실 나이에 크게 구애 받지 않을 수도 있다. 정신적으로는, 견고한 경력의 닻을 내렸을 때다. 경력의 닻(Career Anchor)이란 샤인(Schein, E.H.)이 제시한 개념으로, 개인 경력 개발의 지향점이 되는 중요한 가치나 동기를 말한다. 배가 항구에 정박할 때 닻을 내리는 것처럼 개인적 직업 생활의 뿌리가 된다. 보통 조직 같은 울타리, 돈 나올 구멍 등을 일컫기도 하지만, 도전과 자율 등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직업적 가치도 경력의 닻이 될 수 있다. 마지막은 감정적으로, 홀로서기의 외로움에 익숙해졌을 때다. 직장인일 때는 결코 느껴보지 못한, 사회적으로 '단절' 됐다는 '쎄한' 느낌은 퇴사 생활의 백미다. 혼자 놀기를 극강의 취미로 여기는 성격 유형조차 심지어 그 낯섦에 잠을 설치기도 한다. 이런 것들 중 하나만 확실하더라도 퇴사감은 분명 확 줄 것이다.


멋 모르고 '퇴사 천국'을 외치기엔 나이가 들었고, 은퇴라는 단어를 꺼내기엔 아직 젊다.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반퇴자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동기와 친구들이 다시 직장을 구하고, 직업적 성취를 위해 여전히 바쁘다. 그런데 정작 자신에게는 돌아갈 직장이 없다. 마지막 직장을 나오며 다짐했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는 직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칭찬해 줄 건 지금까지 이 약속을 지킨 것이다. 정확히 오늘이 퇴사 1430일 되는 날이다. 하루 8시간으로 치면 1만 시간 하고도 1440시간이 지났다. 그럼에도 살아있다. 하지만 딱히 내세울 것도 없다. 아직 퇴사자라고 하기에도 논쟁(?)의 여지는 있다. N잡러 비슷하게 이것저것 일은 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사는 법'을 노트에 끄적일 만큼 완전무결한 백수생활을 곁눈질하지만 반퇴자의 현실은 고달프다. 자칭 대표 직업이 창직가인 만큼 스스로 붙여줄 직장 대안 명칭은 수없이 많다. (남들이 직업을 물을 땐 그때그때 달라진다. 은행에서는 통번역가, 집에서는 게스트하우스 운영자, 세무서 등에는 임대사업자/경매투자자 등 다양하게 불린다.) 필명이 '직업을 짓는 작가'인 것처럼 취미는 새 직업명 생성자다.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 꽃이 되었다"는 시구처럼 새 직업 활동에 이름을 붙이면 그것에 더 매진하기 좋다. 그 의미와 동기가 더 단단해지기 때문이다. 이제 아무도 시키는 사람 없는 직장을 나와 일을 지속하기 위한 나름의 방편이다. 어제 직장에서의 일이 오늘 하나의 놀이가 된 셈이다. 물론 이름뿐만 아니라 새로 개발한 독립적 직업으로 원하는 수입까지 거머쥐는 게 최종 목표다.


그래서 스스로를 퇴사인으로 부르기로 했다. 엄연한(?) 직업이 있고 더 이상 퇴사자는 아니지만, 여전히 탈직장인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직장인의 대항마, 퇴사인이다. 탈직장인 보다 좀 더 부르기도 낫지 않나. 직업적 퇴사자 선언이다. "직장가기 싫은 사람, 회사일하기 싫은 사람 모여라" (노래). 직장을 나와 버티는 시간이 쌓일수록 점점 퇴사 마스터가 되어가는 것 같다. "이제 퇴사 콘텐츠를 끊을까" 한때 생각했다. 언제부터인가 누가 쓴 퇴사 이야기도 별로 재미없다. 매일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퇴사 드라마 아닌가. 퇴사 글을 그만 쓸까 고민도 했다. 향수는 나아가는 힘이 없다. 되려 쓸쓸한 후회감으로 뒷걸음치지나 않을까 우려됐다. 앞으로 뭘 할지, 어떻게 살지, 한 자라도 더 적고 곱씹는 것이 오히려 도움 되지 않을까. 퇴사 관련 책을 수없이 읽고 10년 넘게 완전한(?) 퇴사를 계획했으나, 퇴사자의 현실은 딴 세상이다. 결국 자신만의 이야기를 직접 써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된다. 누구도 대신해 수 없는 것이 퇴사의 실제다.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도 여전히 퇴사자임을 느낄 때가 있다. 문득 홀로 서 있다는 외로움에 사무칠 경우다. 이것은 극한 자유이자 동시에 위태로움이다. 직장인 때는 경험해보지 못한 복잡계의 세계다. 사회인과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외톨이 사이 경계에서 외줄을 타는 것이다. 성공하면 자유직업인으로 삶의 새 지평을 열 수 있다. 나비처럼 원하는 직업 세계를 훨훨 날며 퇴사라는 허물을 한 번에 벗어던질 수 있다. 하지만 까딱 잘 못해 떨어진다면 곧바로 사회 부적응자다. 이런 일들을 겪으며 퇴사자의 잠 못 드는 밤은 늘어간다.


퇴사 후 지금까지 겪은 잠 못 드는 밤 유형은 대략 3단계로 추려진다.

격동의 흥분기- 퇴사 초기, 에너지가 넘쳤던 시기다. 자다 말고 불쑥불쑥 깨서 앞으로 어떻게 살지 고민하곤 했다. 열정적으로 퇴사 콘텐츠를 적거나, 새로운 직업 구상에 몰두했다. 새벽 글쓰기 등 좋은 습관을 들이는 계기가 됐지만, 고요한 시간에 홀로 깨서 이전 직장에 대한 원한(?) 등의 분을 삭이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기로 삼았다.

두려움의 현실적응기- 퇴사 중기, 퇴사라는 동력도 시들해지고 새로운 먹이거리(?)를 찾아 방황하던 시기였다. 냉정한 현실 앞에 여러 좌절을 겪으며 자포자기식 마음이 들곤 했다. 이 시기 밤새우듯 잠을 못 잔 이유는 각종 오락과 방탕함 때문이었다. 대안적 즐거움을 찾았다기보다, 별 볼 일 없는 내일을 회피하고픈 무의식의 발동이 컸다.

규칙과 불규칙의 혼재기- 퇴사 말기부터 현재까지, 잔잔한 일상 속에서 묵묵히 할 일을 하며 다시 기회를 노린다. 크게 흥분할 일도 없지만, 낙심할 일도 별로 없다. 이것저것 이미 다 겪어봤기 대문이다. 이때 가벼운 일상 등으로 누우면 골아떨어지는 경우가 자꾸 준다. 별 이유 없이 시름시름 잠 못 드는 날들이 종종 있다.


이럴 때 스스로에게 내리는 수면처방은 '계속 걷기'다. 1-2시간, 1만보, 2만보 등을 계속 걷다 보면 그날 밤은 잠이 절로 온다. 자연과 함께 하는 상쾌한 기분에 마음도 곧장 정리된다. 할 일도 명확해지고 의욕이 솟구친다. 계속 걷기는 물리적 걸음에 그치지 않는다. 삶과 일의 목표를 향한 여정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것은 직장인이든 퇴사인이든 다르지 않다. 직장인일 때도 잠 못 드는 밤이 종종 있었다. 여러 고민이 들 때마다 인생의 최종 목적을 돌아봤고, 자기계발과 투자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업체를 인수했고, 어느덧 퇴사자가 되었다. 퇴사가가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이 길의 끝에 어느 직장인 못지않은 뿌리 깊은 새 직업인의 미래가 있는 것을 안다. 이것은 평생의 경력 길에서 얻은 변함없는 교훈이자, 지금까지의 삶을 이끌어준 원동력이다. 목표를 향해 계속 걷는 힘, 갈 때까지 가보는 믿음이야말로 어느 순간 능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낯설고 두렵지만 결국 퇴사 생활도 그렇게 지나게 된다.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도전하고, 실패든 성공이든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 족하다. 내일 조금만 더 나아질 수 있다면 오늘 어떤 일도 결코 헛되지 않다. 그것은 다가올 미래를 꿈꾸고, 오늘 하루를 편히 잘 수 있는 위로가 된다. 하던 일로 신나게 쓸 글이라도 한편 있으면, 일찌감치 잠을 청하게 된다. 눈은 스스륵 감기고, 아침이 오기 무섭게 다시 떠진다. 앞으로 쓸 글, 할 이야기가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다. 누군가의 퇴사 드라마도 결국 이 글의 일부고, 스스로 써 내려가는 인생 역사의 한 장을 이루게 된다.


* 여긴 공동 묘지다. 잠은 여기서 실컷 자기로 하고, 오늘도 자신의 달려갈 길을 마저 달리자. 주차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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