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미가 커다란 박스를 밀며 거실로 들어왔다.
“자기 뭐 주문했어?”
“등산 장비.”
“등산?”
“자기가 눈 쌓인 산 꼭 가고 싶댔잖아. 이번 주 눈 온대. 같이 가자. 그리고 어제 내가 한 말은 잊어. 내가 잘못했어.”
다미는 다시 어젯밤의 말싸움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애써 밝은 척을 했다.
“어디 봅시다. 장비 센스.”
유건이 박스를 열어보는 다미를 어두운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다미가 빈 휠체어를 밀고 병원 로비를 지나가다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사람들 안으로 트랜스휴먼 여성이 경찰들에게 붙잡혀 있었다. 일전의 윤빈 할아버지 트랜스휴먼 부인이었다. 사람들 사이에 있던 제휘가 다미 곁으로 다가왔다.
“아침에 윤빈 환자분 돌아가시면서 부인을 말소시킨다고 했대요. 부인이 말소되기 싫다고 도망치다 잡혔고요.”
다미의 목에서 또다시 헛구역질이 나왔다. 다미는 애처롭게 끌려가는 윤빈 할아버지의 부인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씁쓸해요.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게 합법적인 것 같아서.”
다미는 끝까지 버티는 트랜스휴먼의 마지막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우며 돌아섰다. 사무실까지 걸어오는 내내 트랜스휴먼 부인의 마지막 표정이 지워지지 않았다. 얼굴이 화면이었지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자리에 돌아와 의자에 앉은 다미가 문득 달력을 보았다.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숫자를 세다가 세 번째 손가락에서 멈췄다. 다미가 설마 하는 생각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서랍에서 임신 테스트기를 꺼냈다. 테스트기 끝에 달린 주삿바늘을 손가락 끝에 살짝 찔렀다. 바로 테스트기 화면에 ‘임신’이라고 떴다.
다미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믿을 수 없었다. 핸드폰을 들어 유건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내려놓았다.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들은 그의 밝은 표정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창밖에는 하얀 눈이 왈츠를 추며 소복이 내리고 있었다. 다미가 하얀 눈을 바라보면서 배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이거면 충분해.”
온 산이 하얗고 두툼한 눈 코트를 입었다. 다미는 힙색만 두르고 배낭을 멘 유건의 뒤를 따라 산을 올랐다. 유건의 입에서는 입김이 나오지 않고 다미의 입에서만 입김이 퍼졌다. 숨소리가 거친 다미와 다르게 유건은 힘든 기색이 전혀 없었다.
“힘들면 업어줄까?”
“힘들라고 오르는 건데 괜찮아.”
“힘들면 말해. 쉬었다 가자.”
“응.”
그때 한걸음을 내딛던 다미가 눈길에 미끄러지려는데 유건이 잽싸게 다미 손을 붙잡았다. 다미의 발길에 눈이 산비탈로 후드득 떨어졌다.
“조심해.”
십 년 감수한 표정으로 다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혀를 짧게 내밀었다. 이번엔 유건이 다미를 앞세우고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다미가 헉헉거리며 드디어 정상에 발을 내디뎠다. 두 사람은 바위에 나란히 앉아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바람이 한 바퀴 돌고 사라졌다.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뿌연 공기가 멀리 산비탈을 가리고 있었다. 다미가 입김을 품으며 말했다.
“날이 흐려서 좀 아쉽다.”
“다시 눈 올 거 같아.”
“응. 조금만 쉬고 내려가자.”
유건이 배낭 옆에 꽂아 둔 보온병을 꺼내 따뜻한 커피를 다미에게 건넸다. 다미가 양손으로 컵을 쥐고 한 모금을 삼켰다.
“아. 좋다. 너무 좋다. 차가운 공기, 하얀 눈, 뜨거운 커피.”
“좋아? 그럼 나도 좋다.”
“진즉 올 걸 그랬지?”
“그러게.”
“다음 주에 아이씨뱅크 가자.”
맞춤법과 띄어쓰기 오류, 비문 등 발견 즉시 제보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