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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과 앤 Dec 04. 2024

붕어빵이 터트린 활화산

질질 흘리고 다니는 소백이와 대백이. 치우다 터진 한 여인의 대환장극


"아빠, 우리는 왜 맨날 혼나야 돼?"


 오늘도 어김없이 뇌리에 박히는 한 마디를 발사하는 아드님. 그래, 왜 그럴까. 도대체 너희는 왜 매일 내게 혼나야 할까. 너희의 잘못이 멈추지 않는 걸까. 받아들이는 내 품이 밴댕이 소갈머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이 악순환의 고리는 과연 끊을 수 있는 것일까. 여전히 오늘도 악역을 차지하게 된 현실이 조금은 억울하지만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니, 우리 해결의 실마리를 좀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청순가련하고 교양 있는 여주인공, 나도 해보면 안 될까.



 

 분주했던 저녁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냉장고를 연 채 식재료를 훑어보고 머리로는 저녁 메뉴를 선정하고 눈으로는 숙제하고 있는 아이를 확인하며 가장 바빠야 하는 몸은 벌써 손 따로 발 따로 움직여 제 할 일에 나서는 저녁 준비 겸 브레이크 댄스타임 같기도 한 이 시간. 그나마 무난한 저녁을 맞이하기 위해 다년간 걸쳐 습득한 노하우가 빛을 발휘하는 순간이기도 한 이때, 필요한 것은 절도 있는 손발 기술과 스피드. 거기에 고난도 기술이 요구되는 아이의 숙제 지도까지 추가되면 이 시간은 하루 중 가장 피곤한 육체노동과 감정 노동이 컬래버레이션 된 극한직업 촬영현장을 방불케 한다. 그리하여 일순간 헬스키친 고든  램지로 돌변하는 위태로움이 찾아오기도 하니 산행으로 치면  8부 능선, 깔딱 고개인 셈이다. 칼질을 하고 음식을 볶는 와중에도 아이의 질문은 계속되고 목청 높여 대답하다 안되면 불에 올린 음식은 운명에 맡긴 채 조리대와 거실 사이를 오가는 왕복 달리기 한 판. 그렇게 번을 반복하면 애미의 인내심도 불위에 식재료도 지져지고 볶아져 어느새 물아일체가 되는 이 웃픈 상황. 그래도 어찌어찌 견디다 보면  어느새 찌개가 완성이 되고 그날의 재료들이 나물로, 볶음으로, 생선조림으로 바뀌어가는 숨 가쁜 체험 주부 생활. 가까스로 완성된 음식이 식탁을 빼곡히 채우면 드디어 가족이 둘러앉아 누리는 행복한 저녁시간이 돌아온다. 누구에게는 입맛 당기는 맛있는 저녁을, 누구에게는 진이 빠져 입맛조차 잃은 그저 그런 한 술이 되는 다소 공평치 못한 동상이몽 공존하는 자리. 그럼에도 이 자리를, 우리는 행복이라 말한다. 물론 행복하다. 빈 말은 아니다. 행복하긴 한데 매일 반복하는 이 진 빠지는 노동이 너희를 살찌우고 덕분에 제대로 갖춰먹는 내 한 끼가 되는 순간이니 멈춰서는 안 되는 의무와 권리 어디쯤인데 매번 이렇게 하기가 싫으니 행복을 무를 수도 없고 죽겠는 거다. 아직도 눌러지지 않는 이 마음. 그러니 보살의 길은 멀고도 먼 것이다. 그래도 잘 먹으며 웃고 떠드는 부자 덕에 기운이 나다가도 싱크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설거지를 보면 한숨이 또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 차려낸 시간에 비해 참 빨리도 끝이 나는 식사 시간. 그리고 또다시 시작되는 설거지옥. 그 사이 아빠에게 토스된 아이는 예상보다 빨리 숙제를 마무리하여 그날의 식순이 순풍에 돛을 단 듯 순조로워 드디어 슬기로운 주부생활의 마감시간이 임박했구나 했다. 그래서 잡은 청소기였다. 여유가 있으니 청소기나 한번 더 돌릴까 싶어서.



 아이 잠옷을 챙겨 나와 씻길 준비를 하던 남편과 욕실 앞에서 마주쳤을 때까지는 퍽 괜찮았다.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사레들어 컥컥 대는 청소기가 내 속을 뒤집어 놓을 줄은 까맣게 모르고 남편과 눈인사도 나눴더랬다. 익숙한 백색소음에 플랫이 붙는 게 이상해 흡입구 쪽을 들여다보니 까먹고 버려진 쿠키봉지가 삐죽 고개를 내민다. '으이구. 그래, 눈 한번 질끈 감자. 거의 다 끝나간다.' 봉지를 빼 주머니에 넣고 허리를 삐끗할까 조심조심하며 잔뜩 구부려 소파밑으로 청소기를 밀어 넣었는데 다시 컥컥 대는 불쌍한 청소기. 아까랑 똑같은 그 쿠키봉지였다. '누구냐. 까먹을 때는 좋더냐. 누구더라 치우라고 이 구석에 이걸 쳐 박아두었다는 말이냐. 소백이냐, 대백이냐. 8부 능선, 깔딱 고개도 잘 참고 견뎠는데 하산길버티고 있던 쿠키봉지 따위에 걸려 넘어지게 하다니. 오늘 아침 주머니 속 화장지를 깜빡한 누구 때문에 세탁기 문을 열고 분노에 떨던 그 손에 다시 쿠키봉지 나부랭이를 쥐어 주다니.' 순간 꼭지는 돌았고 참았던 모든 울분이 일제히 분화구로 밀려 올라와 용암으로 분출됐다. 속사포 랩이 되어 쏟아져 나온 분노에 순항 중이던 우리의 행복한 저녁 산산조각 난 사금파리가 돼 흩어져 버렸다. 혹시라도 밟을까 뒤꿈치 들고 조심조심 걸어야 하는 심각한 분위기 속에 눈치 보며 멀뚱멀뚱 듣고만 있던 용의자, 대백이와 소백이. 그중 결코 억울한 건  못 참아 넘기는 용의자 2 소백이가 말문을 열어 발사했다.


" 아빠, 우리는 왜 맨날 혼나야 돼?"


 억울한 항변이 채 끝나지도 않은 아이를 서둘러 욕실로 데리고 들어가는 제 발이 저린듯한 또 다른 용의자.(대백이, 너구나. 도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냐. 14년째 이러는 건 너무하지 않냐. 아침에도 너였잖아.) 되돌아올 리 없는 메아리를 외쳐놓고 찾아드는 후회와 사그라들지 않는 열불 사이를 오가며 남은 청소를 마무리하는데 아이가 했던 말이 계속 따라다녔다. '그래 너희는 왜 매일 내게 혼이 나는 것일까?',  '아니, 왜 나는 너희에게 화가 나는 것일까?'


 대백이는 지난 14년간 내게 수많은 보물 찾기를 선물한 장본인이다. 그 숨겨놓은 보물들이 사랑하는 아내를 위한 최수종급 이벤트였다면 이 글은 탄생하지 못했을 테니 감사해야 하는 것인가. 허나 이 글감 하나를 놓친다 해도 아쉽지 않을 만큼  질력이 나는 숨바꼭질이었다는 걸 분명히 하고 싶다. 그러니 이 놈의 숨바꼭질, 그만하고 싶다. 그런데, 어느 날은 과자봉지였다가 어느 날은 양말 한 짝이었다가 그리고 또 어느 날은 애타게 찾던 신용카드, 주민등록증이었던 그 참담한 날들이 앞으로도 10년 이상 리바이벌이 될지도 모른다는 이 불길한 예감이 나를 흔드는 것이다. 대백이를 복사해서 붙인 것 같은 붕어빵 외모까지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유전의 법칙이니 어쩔 수 없다 쳐도 안 닮았으면 했던 그 부분까지 굳이 닮아서 나왔으니 이런 박복한 복불복 유전이 있나. 사탕봉지, 과자봉지까지는 똑같은 수법이더니 이제는 쓰던 지우개가 사라지는 건 예삿일이고, 아끼는 건데 없어졌다고 울고 불고 하던 레고조각은 속옷서랍에서, 핸드폰 대신 채워놓은 스마트워치가 사라져 온 동네를 뒤지게 하더니 일주일 후  태권도 학원 수납통에서 발견되는 웃지 못할 해프닝까지. 불길한 예감이 점점 버라이어티 한 현실로 선명해질 때마다 두 주먹 꽉 쥐고 의지를 불태우게 된다. 결단코 그 리바이벌을 막아 보리라. 세 살 버릇을 고치지 못한 대백이의 결과는 14년째 계속된 아내의 잔소리에도 나아졌나 하면 재발하는 고질병 상태. 그렇다, 너무 늦게 조치에 들어가면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할 일은 명확하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조치를 취하는 것이 포인트, 그래야 그나마 희망이 있다. 체크리스트, 투두리스트, 필통검사, 내가 떠난 자리엔 쓰레기를 남기지 않아요, 공부한 후 책상은 스스로 정리해요, 레고는 레고박스에 크기별로 정리해요. 옷을 벗을 때는 주머니를 꼭 확인해요. 갖은 수단과 방법으로 철벽 방어하고 있지만 솔직히 자신은 없다. 그래서 쌓여가던 불안감이 일상의 스트레스와 만날 때면 폭발하고 마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의 이 야심 찬 계획은 현재 진행형이다. 아직 포기하기에는 너의 이파리가 너무 연하고 연한 것을. 그러니 우리, 슬슬 살살 가랑비에 옷을 좀 적셔보자. 축축하면 해 아래 좀 놀다가 다시 적시고 그러다 보면 저절로 스며들어 조금 더 탄탄한 뿌리와 이파리가 되지 않겠니. 너를 위한 것이라 하지만 실은 나도 그런 너를 보며 뿌듯함 한번 느껴 보고 싶구나. 너와 나를 위한 이 야심 찬 계획에 사인 좀 해줄래.



"서한아, 학교 갈 준비 잘 됐는지 한번 확인해 봐야지?"


 이제 막 프라이팬에 계란을 터트리며 최대한 채근하지 않는 뉘앙스로 교양 있는 여주인공이 되어본다. 너의 아침을 기분 좋게 열어 주는 것은 성공을 위한 밑밥이자 산뜻한 하루를 위한 필수 조건. 기분 좋은 판에서 선수는 신기록을 갈아치우는 법 아니겠니.


"알림장, 효 감사 노트, 두 줄 쓰기 노트, 물병, 투명파일, 필통"


주문 외우듯 중얼거리며 확인하는 아이에게 좀 더 확실한 준비를 요구하는 야심 찬  J형 엄마.


"필통 정리는 된 거지?"


"그건 이미 어제 끝났어. 어젯밤에 연필 깎는 소리 못 들었어?"


확신에 차다 못해 너무도 당당해 카랑카랑해진 목소리에 오늘은 마음을 놓아본다.


그래, 제2의 대백이는 안된다. 언젠가 너의 옆을 지킬 그 여인에게 잔소리 듣지 않게 해 주마. (아니 좀 더 솔직하자 애미야.) 너의 그 여인에게 싫은 소리 듣고 않지 싶구나.

(네. 어머님, 짐작하시겠지만 저 어머님 욕 많이 했습니다. 오죽해야 말이죠. 그래서 저는 그 욕 안 먹으려고요. 죄송합니다.)


나의 이 야심 찬 계획은 성공할 수 있을까.




사진출처-뉴시스,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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