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구리 세공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천재 건축가
바르셀로나는 ‘유럽인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도시’이다. 그리고 그 바르셀로나를 지금의 바르셀로나로 만든 사람은 바로 가우디이다.
우리는 보통 건축가를 예술가로 취급하지 않는다. ‘건축가’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주는 느낌은 예술가보다는 기술자에 가깝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그런 나의 편견을 와장창 깨뜨려준 이가 바로 가우디였다. 예전에 나는 건축물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란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처럼 무너질 걱정 없는 튼튼함 내지 견고함이라고 생각했었다. 최첨단의 편리한 기술적 요소가 첨가되면 금상첨화였고.
그리고 가우디를 만났다.
예술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그냥 예술이 아니었다. 만질 수도 있고, 그 안을 거닐 수도 있고, 그 속에서 살 수도 있는 예술이었다. 예술 속에서 숨을 쉬고, 잠들 수 있다니…….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버스를 타고 처음 바르셀로나 시내에 들어선 순간, 거리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궁전, 성당 등 유적지가 아닌 거리에 즐비한 건물들이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개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침 내가 탄 버스는 가우디의 ‘채석장이라는 뜻의 <라 페드레라(La Pedrera)>로도 불리는 <까사 밀라(Casa Milá)>와 <까사 바뜨요(Casa Batlló, ‘뼈로 된 집’으로 불린다)>를 지나치고 있었다. 건축에 문외한이었던 나는 그렇게 가우디와 사랑에 빠졌다.
다시 찾은 바르셀로나에서 가우디는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간의 건축은 직선이지만 신의 건축은 곡선’이라고 말했던 가우디의 신념대로 여전히 구불거리고 물결치며 나를 휩쓸었다. 단색의 네모난 타일에 익숙했던 내게 충격을 주었던 원색의 알록달록한 모자이크는 여전히 햇빛에 반짝이며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단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처음 방문했을 때보다 훨씬 늘어난 관광객들의 숫자와 몇 배로 뛴 입장료뿐이었다. 처음 내가 방문했을 당시에는 스페인이 그다지 관광지로 각광받지도 않았고 물가도 싼 편이었다.
내가 가우디의 작품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 유리나 타일로 된 모자이크이다. 타일이라면 목욕탕의 타일밖에 모르던 내게 깨진 타일로 만든 모자이크는 문화적 충격이었다. 그 완벽하게 독창적이고 섬세한 퍼즐조각들은 처음부터 그리고 아마 영원히 나를 사로잡은 채 놓아주지 않을 것 같다.
가우디가 타일에 빠지게 된 건 처녀작인 <까사 비센스(Casa Vicens)>를 지을 때였다. 당시에 타일은 고가의 건축자재였다고 한다. 하지만 건축주인 비센스가 부유한 타일업자였던 덕분에 가우디는 타일을 원하는 대로 마음껏 쓸 수 있었다. 그리고 가우디는 점점 더 발전해 깨진 타일로 모자이크를 만들기 시작했다. 비센스가 타일업자였던 것에 감사한다. 그가 타일업자가 아니었다면 가우디가 타일의 새로운 가능성을 더 늦게 깨달았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가우디 최후 걸작이라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La Sagrada Familia,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성聖 가족'이라는 뜻으로, 예수와 마리아 그리고 요셉을 뜻함)>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다지 큰 감명을 받지 못했다. 가우디가 죽을 때까지 매달렸던 유작인데다 <까사 밀라>, <까사 바뜨요>, <구엘 공원(Park Guel)> 등 가우디의 다른 작품을 다 보고 난 뒤라 기대감이 커서일지도 모른다. 거대한 건축물이 으레 그렇듯 나를 한눈에 압도하길 기대했었는데 가우디의 성당은 워낙 섬세하고 복잡했다. 게다가 공사 중이라는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중장비들이 곳곳에서 보이는데 어찌나 심란하던지.
물론 그 생각은 성당에 한 걸음씩 다가갈수록 달라졌다. 조금만 높은 곳에 올라가면 바르셀로나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거대한 성당이었지만, 그 거대함 속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독창성이 넘쳐흘렀다. 성경을 읽지 않아도 예수의 인생을 알 수 있는 파사드의 조각 하나하나, 부드럽게 솟아오른 첨탑의 글귀 하나하나, 넓은 성당 내부를 화려한 빛으로 채우는 스테인드글라스의 조각 하나하나까지 어느 것 하나 쉽게 눈을 뗄 수 없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사람과 동물 장식은 모두 실제 모델이 있다. 자신이 원하는 모델을 찾으면 가우디는 석고 모형 틀을 먼저 만들었기에 그의 작업실에는 죽은 새와 동물들의 시체가 가득했다. 살아 있는 동물이라도 석고를 부었고, 병원에 안치된 연고 없는 부랑자의 시체를 이용하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이나 동물들이 정말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한지도 모르겠지만, 약간은 섬뜩하기도 하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건축은 원래 빌랴르(F. de P. Villar y Lozano, 1828〜1901, 스페인의 건축가)에게 맡겨졌지만, 재정적인 문제로 이듬해에 가우디가 넘겨받게 되었다. 그리고 가우디는 죽을 때까지 성당에 모든 것을 바쳤다. 류머티스 관절염 때문에 산책을 하는 것 외에는 성당에서 먹고 자며 자신의 전부를 쏟았다. 오죽했으면 트램 사고를 당한 뒤, 초라한 행색 때문에 부랑자로 오해받아 빠른 처치를 받지 못할 정도였을까. 그런 가우디의 희생을 알기에 가우디의 장례행렬은 선두에 선 사람들이 성당에 도착했을 때에도, 병원에서는 출발도 하지 못한 사람들이 꽤 많이 남아있을 정도였다. 교황청의 배려로 가우디는 성자들만 묻힐 수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지하예배당에서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성당 공사를 지켜보며 잠들어 있다.
1882년 착공된 후, 아직까지 공사를 하고 있는 성당은 가우디의 사망 100주기가 되는 2026년까지 완공하기 위해 공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기부금만으로 지어지는 성당이기에 기부금 모금도 중요한 변수 중 하나라고 한다.
성당이 한눈에 들어오는 벤치에 앉아 있는데 한국인 단체 관광객이 몰려들었다. 가이드가 열심히 성당에 관해 설명을 했다.
“예전에 유명한 건설회사 중역들이 단체로 여행을 온 적이 있었습니다. 짓기 시작한 지 100년이 넘었는데도 언제 완성할지 기약 없는 상태라고 하자 중역 한 분이 말씀하시더군요. 우리 회사에 맡겨주면 6개월이면 완공해 줄 수 있는데.”
순간, 나도 모르게 킥 웃어 버렸다. 처음 바르셀로나에 왔을 때도 가우디 투어 가이드가 그 일화를 들려주었다. 아마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서 가이드들은 모두 그 일화를 들려주는 모양이었다. 우스우면서도 씁쓸했다. 우리나라의 건축 수준은 세계적으로 뛰어난 편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빠른 시간에 하늘 높이 뻗어나가기만 하는 네모난 건물을 보고 있노라면 의심스럽다.
고달프고 아픈 삶, 현관문을 열고 복도에 나가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치고 힘든 삶, 창문을 여는 것만으로도 미소를 지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까사 밀라>에서 살고, <까사 바뜨요>에서 일하고, <구엘 공원>에서 산책을 했으면 좋겠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해도 그런 도시에서 살 수 있다면 기다릴 수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우디의 작품은 뭐니 뭐니 해도 <구엘 공원>이다. 완벽하게 자연과 어우러진 공원을 거닐다 보면 고민이나 근심 따위는 스르르 어디론가 사라진다. 밝은 햇살 아래 반짝이는 모자이크는 하루 종일 바라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다. 가우디의 후원자였던 구엘이 다른 곳을 모두 제쳐두고 구엘 공원에 묻히길 바랐는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구엘 공원은 아름다웠다.
가우디가 건축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면, 구엘은 가우디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구엘은 자신의 돈으로 가우디의 전시회를 열 정도로 가우디의 천재성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또한 구엘은 가우디가 원한다면 수익성에 대해서는 따지지도 않고 건축비용을 지불했고, 다른 이들이 가우디의 디자인을 비웃을 때에도 꿋꿋하게 가우디의 곁에 남았다. 그들의 관계는 예술가와 후원자를 넘어선 관계였다.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건축에만 매달렸던 가우디에게 구엘은 친구이자 가족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의 손길로 반질반질한 구엘 공원의 모자이크 벤치에 앉아 구엘을 위해 기도했다. 가우디의 천재성을 알아봐 준 것이 고맙고, 가우디를 후원할 수 있을 정도로 부유했던 것이 다행이고, 외로운 가우디의 곁을 끝까지 지켜준 것이 감사해, 구엘을 가우디에게 보내 주신 신께도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있는 친구를 내게 보내준 것에 대해서도 감사기도를 드렸다.
친구와 나는 기억할 수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낸 사이였다. 어릴 때는 싸우기도 많이 싸웠고,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에서도 의견이 다른 적이 많아 싸움에 가까운 논쟁을 벌이다 한동안 연락을 끊기도 했다. 그래도 결국은 어리석은 싸움을 후회하면서 화해하는 일을 반복하며 서로의 곁을 지켰다.
한때 너무 힘들어 다 그만두고 싶은 적이 있었다. 너무 지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들고만 싶었다. 하루하루가 절망이었다. 행복할 때는 혼자여도 여전히 행복할 수 있지만, 불행할 때는 함께여도 불행한 법이다. 우울과 절망은 전염되기 쉬운 감정이다. 내 주위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지치기 시작했다. 전화기를 붙잡고 우는 내게 엄마는 짜증을 냈다.
“이렇게 울 거면 전화도 하지 마. 너만 우울하면 되지, 나까지 우울하게 만들어야겠니?”
혼자 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가족과 함께라면 힘든 시간을 버텨내기 쉬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렵게 같이 살자는 말을 꺼냈을 때, 엄마는 단칼에 거절했다.
하지만 친구는 끈질겼다.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내게 전화를 하고, 집으로 찾아왔다. 태풍경보가 내려 강풍이 불어도, 폭설에 버스가 굼벵이처럼 기어도 내게 오곤 했다. 되풀이되는 신세한탄이 지겨울 만도 한데 한 번도 짜증내지 않았다. 무뚝뚝한 성격 탓에 살가운 위로는 못했지만 그저 내 곁을 지키려 노력했다.
하루는 술에 취해 우는 내게 친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전부 다 그만두고 쉬어라. 한 1년쯤은 내가 먹여 살려줄게.”
당시 친구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무언가를 책임진다는 것에 엄청난 부담감을 가지는 편이었다. 워낙 이성적이고 조심스러운 성격이었기에 순간적인 충동에 한 말은 절대 아니었다. 예의상의 하얀 거짓말도 못하는 성격이었기에,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왈칵 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그리고 갑자기 어깨가 가벼워졌다. 나를 짓누르고 있던 삶의 무게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쓰라렸던 상처에 새살이 돋기 시작했다.
그 시절, 나는 많은 기억을 잃어버렸다. 당시 읽었던 책도 기억하지 못하고, 유행했던 가요도 생소하고, 같이 일했던 동료의 얼굴이나 이름은 낯설었다. 고통과 아픔으로 인한 스트레스성 기억상실이었다. 그런데도 친구의 그 말만은 기억에 남았다. 우리는 천재성이 결여된 가우디와 땡전 한 푼 없는 구엘이었다. 친구를 내게 보내준 신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나서 <구엘 공원>을 떠났다. 그리고 점심에 뭘 먹을지 의논하다 또 한바탕 싸웠다. 유치하게도. 친구는 오징어 먹물 빠에야(Paella, 볶음밥의 일종)로 유명한 레스토랑에 가고 싶어 했고, 나는 메뉴 델 디아(Menu del Dia, 애피타이저, 메인디시, 디저트가 포함된 오늘의 요리)가 푸짐하다는 레스토랑에 가고 싶었다. 결국 선택된 메뉴는 오징어 먹물 빠에야. 먹고 싶어 했던 친구도, 양보한 나도, 마음 불편한 점심이었다. 아무리 과식을 해도 소화불량에 걸리는 일이 없는 나였지만, 체한 것 같았다. 아마 친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둘 다 말없이 스파클링 와인 까바(Cava)만 들이켰다. 그리고 와인 한 병을 다 마셨을 무렵 친구도 나도 체기(滯氣)가 완전히 가셨다. 왜 싸웠는지는 술에 취해 잊어버렸다. 우린 낮술에 취한 채 신나서 바르셀로나 길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언제나 그랬듯 ‘미안해’라는 사과 따위는 서로에게 필요 없었다. 아마 우린 또 사소한 일로 싸울 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또 아무렇지도 않게 화해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