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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지기 Nov 26. 2021

나도 혼자 있고 싶어요

도토리 시간 - 이진희 글/그림

'쾅!'

요즘 은이가 혼자 만의 공간 속에 숨는 시간이 많아졌다. 12살, 5학년 은이는 한창 사춘기가 진행 중이다.


"혼자 있을 거라고!"

"나가라고!"


 오늘도 은이는 동생과 싸운 뒤 아빠에게 한바탕 잔소리를 듣고는 방으로 숨었다. 은이는 혼자 방에 있으면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에릭 헌터의 판타지 소설 <고양이 전사들>과 일본 만화 <명탐정 코난>을 읽고 비슷하게 쓴 팬픽 소설이 두어 편 되고, 또래 아이들의 판타지 모험이 주제인 글도 몇 편 있었다. 서운하게도 인터넷 동호회의 얼굴도 모르는 친구들과 맨날 싸우는 동생에게는 가끔 글을 보여주면서, 엄마나 아빠에게는 보여주지 않는다. 내가 내 글을 가족들에게 공개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일까? 유일하게 또래 친구들의 판타지 소설 <8의 비밀>을 10편까지 보여줬었는데 모험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 사춘기가 본격화되어서 은이는 가시 세운 고슴도치로 변해버렸다. 그런 가시 돋친 상태가 얼마나 오래 갈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대할 때 마음껏 가시를 펼치는 건 확실하다. 먼저 사춘기를 맞이해본 선배 학모들이 말한다. '지랄 총량의 법칙'이라고, 시기의 문제지 사춘기 시절 엄마 아빠한테 꽂는 가시의 양은 똑같다고.

 그래, 지금 은이는 태어난 이후로 가장 큰 변화와 불안을 겪고 있다는 것도 알겠고, 어느 집이나 다 비슷하다는 것도 알겠지만 아이가 가시로 찔러댈 때 난, 많이 아프다. 엄마 마음이 무쇠로 만든 것도 아닌데 절대 괜찮을 리가 없다.


"은! 넌 엄마를 사랑하긴 하냐?"

"아마도. 하니깐 이러지. 이래도 엄마는 받아줄 거니깐. 아니면 내가 어디 가서 이렇게 해."


그러면서 저도 미안한지 입술을 쭉 내밀면서 '쪽' 소리 낸다.

그래, 엄마는 그 뽀뽀 한 번이면 다 오케이여야 하는구나.




 이진희 작가의 <도토리 시간>이라는 그림책이 있다. 상처를 입은 아이는 작아지고 작아져서 테이블 위 계곡 식빵과 책 숲과 고양이 산을 지나 그림속 다람쥐가 열어준 도토리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연을 마주하고 넓고 푸른 하늘과 들판, 흰 보슬 말을 보며 작아진 마음을 다 풀어내고 다시 채워지고 심심해졌을 때 밖으로 나와서 각자의 도토리 시간으로 떠났던 사람들을 다시 만난다. 작가는 도토리 시간을 <고개 숙인 채 작아진 나의 몸과 마음을 일으키고 채워주는 시간>이라고 했다.

이진희 작가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있자면 나와 은이가 보인다. 페이지를 한 장 한 장씩 넘길 때마다 가시에 찔린 나도, 마음과 몸의 변화가 혼란스러운 은이도 도토리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아이가 자연을 마주하는 것처럼 우리도 각자의 자연을 마주하고 있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다시 서로 속에 들어올 수 있는 힘을 얻어서 돌아온다.



 방 안에서 한참을 시간을 보내고 거실로 나온 은이는 소파의 옆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자기가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인 꼬마 탐정이 해결한 사건의 뒷 이야기를 쉬지 않고 조잘거리고 있다.  아마 만화책을 보다가 재미있는 장면을 같이 나누고 싶어서 나왔나 보다.


(이번에 너의 도토리 시간에 명탐정 코난을 만났구나.)

"오! 코난이 그랬어? 란이는? 엄마도 읽어봐야겠다."


  적절하게 추임새를 넣어준다. 그런 대화가 몇 번 오고 가면 은이는 세웠던 가시를 다시 눕히고 적당히 밝은 은이로 돌아온다. 그런데 나는 아직이다. 많이 까칠한 은이와 조금씩 까칠해지고 있는 영이의 비위를 맞추며 적당한 선까지 꾹꾹 눌러 참아 내고 나면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사실은 아이들이 찔러댄 가시 자국이 쓰리고 아프다. 아이가 웃으면서 다시 들어가도 나는 여전히 속으로는 한숨이 새어 나온다.


밤 11시가 되고 아이들은 다 잠이 들었다. 전날 새벽까지 일한 남편도 오늘은 일찍 침대에 누웠다.

드디어 나의 도토리 시간이다.  밀린 설거지쯤이야, 내일 하면 되지. 못다읽은 책은 다음에 마저 읽자. 막 세탁기에서 꺼낸 빨래와 눈앞의 잡동사니들은...... 손님이 올 것도 아니고 다 미루면 어때, 불금에 청소하지 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난 완전한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맥주 한 캔을 꺼내 들었다. 작아진 나의 마음을 일으키고 채울 시간이다.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고 리모컨을 들었다. 지금부터 난 도토리 속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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