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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지기 Jan 14. 2022

나는 설거지가 싫어요

"밥 줘!"


새벽부터 배고프다고 포효하는 남편의 소리에 잠에서 깼다. 아침 7시가 넘었지만 아직 창 밖은 해가 뜨기 전이다. 반백살을 코앞에 둔 남편은 아침잠이 줄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면 졸면서 TV를 보기도 하고, 출출하면 혼자서도 아침 거리를 잘 챙겨 먹거나 아침식사 당번을 자처하기도 하는데 오늘은 뭔가 다르다. 이유야 있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밥 달라는 날카로운 소리에 잠을 깨는 아침이 별로 유쾌하지 않다.

 어설프게 잠에서 깨어 짜증이 난 상태로 아침을 준비하러 부엌으로 갔는데 '아뿔싸!'. 싱크대 안에 설거지 감이 가득하다. 남편은 거 보란 듯이 째려보고 있다. 이거였구나.

"물을 마실래도, 수프나 끓여먹을래도 먹을 수가 있어야지, 빈 그릇이 없잖아. 어제 설거지하고 잔다며......"

"아이고, 어젯밤에 허리가 너무 아파서, 설거지하고 자려고 했는데 서있기가 힘들었어."

뻔한 핑계를 대면서 당장 먹일 아침밥을 준비했다. 그리고 여전히 쌓여있는 설거지 감을 보면서 생각했다.

'난 설거지가 정말 싫어!'



 

 자취를 시작하면서 요리하는 것은 익숙해지고 즐겨했지만 아무래도 설거지는 친해지지 않았다. 설거지뿐만 아니라 '청소'나 '정리'같은 단어들은 내가 배우려고 해도 나아지지 않는 것들이었다. 항상 설거지통에는 설거지 감이, 책상 위에는 여러 책들과 다양한 필기구가, 방바닥에는 개켜서 정리해야 할 빨아놓은 빨래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보통 친구들이 놀러 오거나, 시험공부를 시작할 때, 뭔가 끝내야 하는 마감이 걸린 일을 빠른 시간에 마무리해야 할 때가 청소하는 날이었다. 공부 못하는 애들이 진짜로 공부해야 하는 순간에 청소부터 한다고 내가 딱 그런 꼴이었다. 막상 치우기 시작하면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는데 왜 항상 미뤘는지.


 "나는 왜 설거지가 싫을까? 정리도 잘 못하고....."

 "게을러서 그래."


 친구가 말로 뼈를 때렸다.


"바로바로 해. 그럼 고민할 것도 없어! 정리하는 것도, 제자리 아닌 게 보이면 바로 치우고......"


그걸 누가 모르나. 요리하면서 조금씩 치우고, 밥 먹고 나서도 바로 설거지하고 눈에 띄는 게 있을 때 바로 치우면 깨끗하다는 것을 머릿속으로 알고는 있지만 습관이 되지 않다 보니 20년이 넘게 흐른 지금도 종종 '다음'으로 미루고 있다.



 밤이 되었다. 저녁 식사 후 식탁은 정리하고 그릇은 싱크대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책상에 앉았다. 여전히 주변은 각종 필기구와 채점해야 할 두 딸의 문제집과 내가 읽어야 할 책들이 쌓여있다.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하면 버려야 할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면지 쌓아둔 것도 폐지함에 버리고, 쓰고 떼어낸 포스트잇 뭉치도 정리하고, 설거지도 아직 안 했는데.....

정리되지 않은 주변의 모습처럼 내 머릿속에도 별의별 잡생각들이 밀려온다. 생각에 생각이 얽혀서 꼬리를 물다가 뜬금없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져서 초록창에 검색어를 입력해 본다.

'설거지가 하기 싫은 이유'  

나와 같은 불만을 토로한 흔적들이 쏟아진다. 그걸 보고 있자니 '피식' 입꼬리가 올라간다. '나만 설거지를 싫어하는 게 아니군.'  검색 결과로 나온 글들을 읽어보는데 그중에서 브런치 장효진 작가의 '설거지싫어요병 투병기'라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오죽 설거지가 귀찮은 것이면 이런 말도 있다. '세상에서 상종 못할 세 가지 사람이 있는데 바로 담배 끊은 사람, 살 뺀 사람, 먹고 바로 설거지하는 사람이다.' 그만큼 신념이 확고한 독종이라는 것이다.
-<설거지싫어요병 투병기>中 (장효진, 브런치)-


먹고 바로 설거지하는 사람이 독한 거였구나. 처음 들어보는 독종에 대한 설에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래서 내가 바로 설거지를 못하는 거야. 안 하는 게 아니라 독하지 않아서 못하는 거였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설거지를 싫어하고 귀찮아한다면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해본다. 그냥 쉬고 싶어서, 실컷 요리하고 먹었으니 다시 에너지를 얻어서 설거지하고 정리하기 위해 잠깐 쉬는 거라고 변명한다.(물론 그렇게 쉬다가 깜빡 잊어버리기 일쑤지만)


먹기 위한 음식을 만드는 것은 생존을 위한 것이라면, 설거지는 삶을 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거지싫어요병 투병기> 中  (장효진, 브런치)


 설거지가 삶을 위한 것이라니. 생각해보면 저녁에 설거지까지 마무리해 놓으면 다음날 아침 식사 준비를 할 때는 공간도 마음도 여유롭다. 주변을 정리하고 다음 과정을 준비하는 것. 그것이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이라는 데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SNS에서 보는 다른 사람들의 깨끗한 부엌을 나도 갖고 싶다면 열심히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정리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후유, 그래도 나는 쉬고 싶다)


코로나 시대를 1년 보냈을 때 밀린 설거지에 지쳐서 식기세척기를 구매했다. 물에 불려 정리한 다음에 식기세척기에 넣어두면 알아서 세척이 될 텐데 그것마저도 종종 미룬다. 그러나 오늘은 깨끗한 부엌을 위해서 적당히 불려놓은 그릇들을 세척기에 넣는다. 내일 아침에 만날 깨끗하고 정리된 하루와 조금은 더 나아질 삶을 위해서. 그렇지만 여전히 난 설거지가 귀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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