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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진짜 꿈

by My Way

그녀와 함께하는 일들이 늘어나면서, 나는 그 누구보다 그녀와 가까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남에게 속내를 거의 드러내지 않던 그녀도 내게는 가끔 자신의 이야길 하곤 했다.

물론, 여전히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길 들어주고 고민을 해결해 주는 것을 더 익숙해했지만, 나 또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길 들어주는 것이 편안한 사람이라 그런지 내게만은 그녀 자신의 이야길 털어놓곤 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우리 연구실 후배들을 걱정했다.

지도교수님 작고 후,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도, 공부를 계속할 줄 알았던 후배가 취업을 하는 것도 모두 자신의 탓인 양 미안해하고 걱정했다.

그래서, 그녀는 10년 안에 우리 연구실 식구들을 한데 모을 수 있는 연구소를 꼭 설립하고 싶어 했다. 그녀는 우리 연구실 사람들만 모이면 이쪽 분야의 어떤 일이든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것 같았다.


겉으로 보기엔 열정적이고 활기차 보였지만, 그녀는 자신의 삶을 꽤 고달파했다.

낮동안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 집에 가면 시체가 된다고 했다. 손하나 까딱할 힘이 없어 아직 중학생인 막내딸조차 챙길 여력이 없다고도 했다.

자신의 일만으로도 벅찬데, 장가간 친정의 남동생이 암투병 중이신 친정아버지를 나 몰라라 해, 장남노릇까지 하는 것도 점점 힘에 부친다고 했다.

그 당시 고3이었던 큰딸이 대학원서를 넣으면서 자신과 같은 과를 넣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엄마가 행복해 보이지 않아서였다고 해서 상처받았다고도 했다. 늘 엄마 편이 되어 주던 아이였는데 그 말이 그렇게 가슴이 아팠다면서 무척 슬픈 얼굴을 했다.


그녀는 경력을 포기하고 아이를 택했던 내 선택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첫째가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한 번도 가족 여행이란 걸 가보지 못했다고 하면서,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는 기본적인 것 외 아이들을 위해 해준 게 없다면서 후회된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때는 그게 정답인 줄 알았고, 그렇게 해야만 했던 때였다고 했다. 그녀가 공부하던 당시에는 학과에 여학생이 1~2명 정도밖에 없을 때라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정말 치열하게 공부했고, 졸업 후에도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다 보니 정작 아이들을 희생시킨 것 같다고도 했다.


"이제라도, 여행 다녀오세요. 애들이 더 커버리기 전에 가족여행 한 번은 다녀오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녀의 너무 바쁜 일상을 알지만, 그래도 툭 뱉은 내 말이 그녀에게 용기를 불러일으켰는지, 정말 그녀는 아이 둘을 데리고 보름간의 미국 여행을 다녀왔다. 그녀만큼이나 바빴던 그녀 남편의 불참으로 결국엔 온전한 가족여행이 되지는 못했지만, 애들과의 첫 여행이라면서 무척이나 설레했고, 다녀와서도 몇 날 며칠을 미국 여행 이야기만 했다.


그런데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가족 여행이 될 줄이야...


그녀는 원래 독신주의자였다고 했다.

그런데, 같은 독신주의자였던 지금의 남편을 만나 어쩌다 보니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고 했다. 사랑보다는 존경에 가까운 관계고, 동종업계지만 각자의 일은 각자 알아서 하자는 주의라 가족보다는 비즈니스 관계인 것 같을 때가 많다고 했다. 그래서 남편보다는 애들 아빠인 경우가 많고 다정다감하지 않지만, 그래도 든든하다고도 했다.


그녀는 그림 보는 걸 좋아했다.

종종 내게도 이름 모를 화가의 그림을 보여주었는데, 내 눈엔 대부분이 비슷해 보여 늘 영혼 없는 리액션을 해주곤 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그녀의 진짜 꿈은 화가였단다.

그림 그리는 걸 너무 좋아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원하는 학과에 가지 못했고, 비슷한 학과에서 꿈을 접을 채 살다가 최근에 와서야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너무 오랜만에 붓을 잡아서 예전만큼의 실력은 나오질 않았지만, 그림 그리는 그 시간이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손하나 까딱할 힘도 없는 퇴근길이 요즘은 설레기도 한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최종 꿈은 무인도를 하나 사는 것이라고 했다.

그곳에 작은 집을 짓고 혼자 살면서 아무한테도 방해받지 않고 마음껏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날, 그러니까 그녀를 본 마지막날에도 그녀는 내게 그림을 보여줬었다.

그때, 그 그림을 좀 더 자세히 살펴봤다면 그녀의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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