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등 편
아이의 첫 시험인 중간고사 객관식 결과가 공지되었습니다. 아직 서술형 시험이 남아 있었지만, 객관식 성적만으로도 등수가 매겨져 나왔습니다.
아이는 두 문제를 틀려 반에서 2등을 했습니다. 1등은 객관식 전부를 맞은 친구였습니다.
"진짜, 잘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
"음... 이 정도면 혼자 공부해도 될 것 같아요."
"학원, 정말 안 가도 될까?"
"네. 지금처럼 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래, 까짓 거. 자기주도학습, 한번 해보지 뭐."
그렇게 해서, 아이는 중학교 생활도 사교육 정글을 벗어나 홀로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서술형 시험을 앞두고 공개수업을 진행했습니다.
중학교 첫 공개수업이라 당연히 참석했는데, 예상보다 많은 학부모님들이 와 계셔서 조금 놀랐습니다.
그날 수업은 담임선생님이 맡고 계신 수학과 전담 선생님이 가르치시는 영어였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수업이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 동안, 한 엄마가 학부모들 사이를 오가며 은근이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 같았습니다.
"여기, 혹시 1등 엄마 오셨나요?"
알고 보니, 그분은 반에서 3등을 한 아이의 엄마였습니다. 모두들 술렁이기만 할 뿐 대답이 없자, 이번에는 "그럼, 수업 끝나고 다 같이 차 한잔 마시는 게 어때요?"라고 제안했습니다.
두 번째 수업인 영어수업은 모둠활동 위주였는데, 아이들이 서로 협력하며 수업에 참여하는 모습은 꽤 흥미로웠습니다.
공개수업이 모두 끝난 뒤, 담임 선생님과 잠시 인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선생님과 눈을 맞추고 '누구누구 엄마'라고 짧은 소개를 했고, 선생님께서는 상담이 필요한 경우에는 따로 연락을 달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렇게 모든 일정이 마무리되었지만, 결국 3등 엄마의 주도로 어색한 모임이 결성되고 말았습니다.
학교 앞 커피숍에 열 명의 엄마들이 모였습니다. 저도 얼떨결에 따라가긴 했는데, 그중에 1등 엄마는 없었습니다. 사실 반 1등 아이는 제 아이와 초등학교 동창이라, 저는 그 엄마를 알고 있었는데, 모임에 참석하지 않고 바로 귀가하시는 것을 봤습니다.
저 역시 잠시 망설였습니다. 중학교 1학년 반 모임이 과연 필요할까 싶으면서도 아는 게 별로 없던 상황이라 한 번은 어울려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커피숍에서 3등 엄마는 결국 저를 찾아내셨습니다. 아마도 자신의 아이를 통해 1등과 2등의 이름을 확인한 것 같았습니다.
"OO이는 학원 어디 다녀요?"
"안 다니는데요."
"그럼, 과외하나 보다. 무슨 과목을 시키고 있어요?"
"안 시키는데요."
"그럼, 뭐해요? 인강 듣나?"
"아무것도 안 하는데요."
"그럼, 이번 시험은 혼자 공부해서 친 거예요?"
"네."
그때부터 저는 두어 시간 동안, 그 엄마가 주도한 질문 공세에 시달렸습니다. 아이가 사교육 없이 반에서 2등을 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습니다. 학원을 다니지 않는다면, 뭔가 특별한 노하우라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어떤 문제집으로 공부하는지 같은 시시콜콜한 것에서부터 제 학력까지 선을 넘나들며 꼬치꼬치 캐물었습니다.
정말 불편한 자리였습니다.
원래 성격상 그 자리가 불편하기도 했지만, 공유할만한 정보가 없던 저는 시선과 질문이 집중되는 상황에서 우물쭈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제가 뭔가를 더 숨기는 것처럼 느낀 것인지, 그 엄마는 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고, 그날은 무척 고단한 하루가 되었습니다.
공개수업 이후 치러진 서술형 시험은 하루 만에 끝났고, 중간고사 종합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약속대로 받은 보상인 일주일간의 달콤한 휴식을 마음껏 즐긴 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첫 번째 시험 이후, 자기주도학습의 효과를 확인한 아이는 3년 내내 같은 방식으로 내신관리를 이어갔습니다. 특히, 자기주도학습의 진가는 1학년 2학기때 운영된 자유학기제에서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아이는 이 기간에도 평상시 공부 루틴을 꾸준히 실천했고, 덕분에 저도 불안감을 떨쳐내며 아이 곁에서 자기주도학습을 돕고 지지할 수 있었습니다.
공개수업 뒤풀이에서 알게 된 엄마들과는 그 후 종종 만나 친분을 유지했습니다. 특히 그날 저를 괴롭혔던(?) 엄마와는 중학교 3년 내내 아이들이 같은 꿈을 꾸면서 부딪힐 일이 많았습니다. 그 엄마는 마당발인지, 모임을 주도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럴 때마다 저를 꼭 초대해 주었습니다.
저는 알려줄 정보가 없다고 아무리 말해도 믿지 않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렇게 불편한 마음으로 몇 번이고 모임에 끌려나갔습니다. 그럼에도 그 엄마의 초청을 단칼에 거절하지 못한 이유는 제법 쓸만한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학고부터 고등학교 입시, 주변 학원 정보, 학군지 학원까지, 웬만한 정보를 다 꿰고 있는 터라, 초청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정보에 목말랐던 저에게 그 엄마는 계륵 같은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감사한 분이셨습니다.
[서른여섯 번째 고슴도치 시선] 학교에서 집까지는 도보 15분 거리입니다. 그런데, 과학실험 방과 후 수업이나 영재학급 수업이 없는 날이면, 아이가 집까지 오는데 장장 40분이 걸리곤 했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한두 시간씩 늦는 것도 아니고 전화도 바로바로 받으니 그냥 그러려니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집 근처 한의원에 갈 일이 있어 나와 있다가, 아이에게서 하교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저는 한의원 진료가 지체되는 바람에 아이보다 늦게 집에 도착할 것 같아서 마음이 급해 부리나케 병원 건물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저만치 앞에 제 아이가 걸어가고 있는 겁니다. 사실 학교에서 한의원까지는 일부러 돌아와야 하는 길이었기에, 반가움과 동시에 궁금함이 생겼습니다. 아이를 불러 세우자, 아이도 조금 놀란 듯했습니다.
"울 아들이 여기 왜 있을까?"
"친구들 학원 데려다주고 집 가는 길이에요."
알고 보니, 방과 후에 친구들이 학원 스케줄로 너무 바쁘자, 학교에서 학원까지 가는 길만이라도 함께하고 싶었던 제 아이의 작은 일탈이었던 겁니다. 그제야 아이가 집까지 40분씩이나 걸린 이유가 이해되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저는 제 아이가 공부만큼이나 친구들과의 관계도 소중히 여기는 아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음 이야기] 자유학기제, 위기일까? 기회일까?
이 이야기의 첫 단추 영유아편과 본격적인 교육 이야기를 담은 초등 편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