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감상] 더 송, 백가흠 作

단편에 대한 단편

by 오로지오롯이


〈더 송〉은 백가흠의 소설집 『사십사』에 수록되었다. 『사십사』는 인간의 욕망, 폭력성, 관계의 균열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단편들을 묶은 소설집으로, 제목 자체가 불길함과 불완전함을 암시한다. 이 작품집에 실린 소설들은 대체로 일상적 상황에서 출발하지만, 그 안에 잠재된 파괴 충동과 도덕적 붕괴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인물들은 자신의 문제를 직면하기보다는 외부의 원인이나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경향을 보이며, 그 과정에서 관계는 왜곡되고 파국으로 치닫는다. 『사십사』는 인간 내부에 잠재된 어두운 충동을 가감 없이 보여주며, 독자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집이다.



작품 스타일


백가흠의 소설은 인간 내면의 폭력성과 위선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대체로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으며, 자기 합리화에 능숙하고, 타인의 고통에 둔감하다. 서사는 빠르고 직선적이며, 감정을 은유적으로 감싸기보다는 노출시키는 방식을 택한다. 이로 인해 그의 소설은 읽는 내내 긴장감을 유지하지만, 동시에 독자에게 상당한 피로감을 주기도 한다.


백가흠은 인물의 내면을 섬세하게 변호하기보다는, 오히려 잔인할 정도로 드러내 보이며 판단을 독자에게 맡긴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소설이 윤리적 질문을 직접적으로 던지게 만드는 힘이 된다. 다만 그 과정에서 인물의 리얼리티와 서사적 설득력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을 경우, 독자는 작품에 감정적으로 이입하기보다 비판적 거리에서 머물게 된다. 〈더 송〉은 이러한 백가흠 문학의 특징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작품 중 하나로, 그의 문제의식과 한계가 동시에 드러나는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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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中 [더 송] 감상


질문으로 시작되는 독서


〈더 송〉을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흥미나 공감이 아니라 물음표였다. 다만 이 물음표는 작품을 더 이해하고 싶어지는 방향의 질문이라기보다는, 납득되지 않는 지점들이 계속해서 쌓이면서 생겨나는 부정적인 의문에 가까웠다. 이 글에서는 이 소설을 읽으며 따라붙었던 질문들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왜 그 질문들이 끝내 해소되지 않았는지를 중심으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박 교수라는 인물의 리얼리티


이 소설의 중심에는 박 교수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감정과 충동을 거의 제어하지 못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문제는 이러한 성격이 특이한 인물 설정으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우리 주변에 흔히 있을 법한 사람처럼 서술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첫 번째 의문이 생긴다. 과연 박 교수와 같은 인물이 독자에게 공감 가능한 인물인가 하는 문제다. 물론 감정 조절에 서툰 사람, 분노를 내면화하지 못하고 표출하는 사람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소설 속 박 교수는 그 정도를 넘어선다. 택시 기사와의 사소한 말다툼에서 상대를 굴복시킨 뒤 도취감을 느끼는 장면은, 그가 지닌 권위 의식과 충동성이 얼마나 극단적인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런 인물이 과연 20년 넘게 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별다른 문제 없이 살아올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소설은 이에 대한 설득력 있는 배경이나 능력을 충분히 제시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인물은 현실적인 인물이라기보다, 작가의 문제의식을 담기 위한 도구처럼 느껴진다.



파괴적 충동의 기원에 대한 설명 부족


소설은 박 교수의 변태적이고 파괴적인 충동을 어린 시절의 개에 대한 기억과 연결 짓는다. 개처럼 오줌을 싸고, 여성에 대한 집착을 보이는 행동을 일종의 부채감이나 트라우마의 결과로 설명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이 연결은 충분히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인간의 내면에 파괴적인 욕망이 존재한다는 전제에는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그러한 욕망을 사회적 규범 속에서 억압하거나 내부에서 곪게 만든다. 박 교수처럼 노골적인 방식으로 분출하는 경우는 극히 제한적이다. 그렇다면 이 인물의 특수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소설은 그 질문에 끝까지 답하지 않는다. 박 교수가 대학 시절부터 바람기 있는 인물이었다는 설정 역시, 그가 현재의 행동을 하게 된 이유를 충분히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특히 미현이라는 인물과의 관계를 모든 원인처럼 연결 짓는 방식은, 인물의 책임을 외부로 전가하는 인상마저 준다.



설명되지 않는 선택들


읽으며 따라붙는 의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제목이 왜 ‘더 송(The Song)’인가 하는 질문도 그렇다. 연작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이해의 여지는 생기지만, 이 작품만을 놓고 볼 때 제목이 서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지는 않는다. 또한 미현을 ‘그녀’와 ‘미현’으로 혼용하는 서술 방식은 인물 인식에 혼란을 준다. 더 나아가, 과거에 개 문제로 깊은 갈등을 겪었던 인물들이 다시 만났음에도 그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지 않는 점 역시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이런 선택들이 의도된 공백인지, 혹은 설명의 누락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 공백이 서사의 여백으로 작동하기보다는 불완전함으로 느껴진다.



남는 문장, 남지 않는 공감


결과적으로 이 소설은 리얼리티와 공감의 측면에서 아쉬움을 남기는 소설이다. 인물의 행동과 심리를 끝까지 따라가고 싶어지기보다는,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단 하나 강하게 남는 지점은 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왜’라는 질문을 하지 못한다. 문제를 풀지 못한 이유는 거기에 있다.”라는 소설 속 문장이다. 만약 이 작품에서 굳이 하나의 메시지를 뽑아야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문제를 끝내 자기 안에서 찾지 못하는 인간에 대한 비판일 것이다. 다만 그 메시지에 도달하는 과정이 충분히 설득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끝내 아쉬운 질문표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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