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감상] 막, 한유주 作

단편에 대한 단편

by 오로지오롯이


〈막〉은 한유주의 소설집 『얼음의 책』에 수록된 작품이다. 『얼음의 책』은 이야기의 서사적 완결성보다 언어의 감각, 인식의 흔들림, 사유의 과정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들이 모인 소설집이다.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은 공통적으로 명확한 사건이나 결론을 제시하기보다는, 관찰과 질문, 반복과 부정의 과정을 통해 독자를 사유의 상태로 밀어 넣는다.


제목이 암시하듯, 『얼음의 책』은 단단하게 굳어 있는 의미의 덩어리라기보다, 차갑고 투명하지만 쉽게 미끄러지는 언어의 표면을 떠올리게 한다. 〈막〉은 이 소설집 안에서도 특히 인식의 불확실성과 화자의 방황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으로, 한유주 문학의 문제의식을 응축해 보여준다.



작품 스타일


한유주의 소설은 서사를 전달하기보다, 인식이 형성되는 과정을 그대로 노출하는 데에 가깝다. 그의 문장은 확정적인 진술을 피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수정하며 흔들린다. ‘이다’라고 말했다가 곧바로 ‘아니다’라고 말하고, 하나의 장면을 제시한 뒤 그것이 실제인지 상상인지 유보한다.


이 때문에 독자는 안정된 의미에 도달하지 못한 채, 생각하는 상태 자체에 머물게 된다. 한유주는 인물의 감정이나 사건의 인과를 설명하는 대신,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의 미세한 이동과 언어가 만들어내는 틈을 포착한다. 그의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일어났는지가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의심과 번복이 발생하는가이다.


이러한 문체는 읽는 이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리얼리즘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 확신에 찬 문장이 오히려 진정성을 잃을 수 있다면, 확신하지 않는 문장은 인간 인식의 실제에 더 가까울 수 있다. 한유주의 소설은 바로 그 지점에서, 한국 소설의 언어를 다른 방향으로 밀어낸다. 『얼음의 책』과 〈막〉은 그 실험이 가장 응축된 형태로 드러난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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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中 [막] 감상


모호함이 먼저 도착하는 소설


〈막〉을 읽으며 가장 먼저 느껴지는 감정은 명확함이 아니라 모호함이다. 이 소설은 기차 안에 있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듯하다가, 곧 그것이 확실한 묘사인지조차 의심하게 만든다. 보고 있는 것인지, 상상하고 있는 것인지, 혹은 말하면서 스스로 뒤집고 있는 것인지 끝까지 단정할 수 없다. 이 소설의 불분명함은 이야기의 결핍이라기보다, 문장 자체가 만들어내는 혼돈에서 비롯된다. “무엇 무엇이다. 아니 무엇 무엇이다.” 혹은 “혹은”이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사용되면서, 화자의 말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수정하고 부정한다. 이 번복의 리듬이 소설 전체를 이끈다. 읽는 동안 독자는 안정된 의미에 도달하지 못하고, 그 불안정한 상태에 그대로 머무르게 된다.



방황을 전제한 문체


이 소설의 중심 정서는 방황이다. 방황이 아니고서는 이 문장과 문체, 그리고 전체적인 분위기를 정당화할 방법이 없다. 화자의 설명은 정돈되어 있지 않고, 그 정돈되지 않음은 하나의 결함이 아니라 이 소설이 의도적으로 선택한 상태처럼 보인다. 우리는 흔히 정리된 생각, 명확한 인식을 정상으로 간주하지만, 사실 인간은 언제나 방황하고 흔들리는 존재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화자는 오히려 과도하게 솔직한 상태에 가깝다. 다만 소설 속의 세계는 그 방황이 지나치게 전면화되어 있어,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 비정상성은 독자를 불편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이 소설이 겨냥한 감각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없는 것’이라는 태도


〈막〉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처음부터 없는 것”이라는 표현은 이 소설의 허무한 정조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존재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존재하다 사라진 것 역시 원래 없던 것이므로 사라져도 괜찮다는 태도. 이 생각은 매우 일방적이면서도, 묘하게 설득력을 가진다. 화자의 사고는 철저히 자기 내부에서만 완결되지만, 독자가 그 문장에 조금씩 익숙해지는 순간, 그 허무는 전염처럼 번져간다. 기대하지 않음, 붙들지 않음, 의미를 끝까지 확정하지 않음. 이 소설은 독자를 설득하기보다, 독자가 스스로 허무한 방황 상태에 들어가도록 만든다.



확신하지 않는 화자, 확신하지 않는 독자


이 소설의 화자는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이 본 것이 맞는지, 말하고 있는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조차 질문한다. “느릿느릿하게 뜨개질을 하고 있는 여자가, 있는가?”라는 문장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 질문은 독자에게 던져지는 동시에, 화자 스스로에게 던져진 질문이기도 하다. 화자는 작가와 독자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의 경계가 흐려지고, 관찰과 해석의 주체도 분명하지 않다. 독자가 이 소설을 읽으며 방황하듯, 화자 역시 자신이 말하고 있는 세계 안에서 방황한다. 이 닮음 때문에 독자는 이 화자를 인물이라기보다, ‘읽고 있는 나 자신’처럼 느끼게 된다.



반복이 만들어내는 전복


이 소설에는 반복이 많다. 관찰된 대상, 떠오른 생각, 문장의 구조까지 계속해서 반복된다. 그런데 그 반복은 단순한 되풀이로 끝나지 않는다. 반복의 끝에는 언제나 전복이 있다. 같은 말을 다시 하는 순간, 그 말은 처음과 다른 의미로 기울어진다. 나는 반복의 반복이 결국 전복을 낳는다고 생각한다. 바람이 반복되면 종이는 뒤집히고, 고민이 반복되면 결심이 생기듯이. 이 소설은 그런 당연한 과정을 보여주면서도, 그것을 끝내 확신으로 굳히지 않는다. 전복이 일어났는지조차 모호하다. 이 모순이야말로 〈막〉의 핵심 정조다. 확신할 수 없음, 판단할 수 없음, 그러나 계속 생각하게 되는 상태. ‘막’이라는 제목은 어쩌면 각자가 지닌 인식의 한계, 판단의 벽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소설의 화자가 독자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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