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감상] 습, 염승숙 作

단편에 대한 단편

by 오로지오롯이


〈습〉은 염승숙의 대표 소설집 『그리고 남겨진 것들』에 수록된 작품이다. 이 작품집은 사라진 것, 잊힌 것, 말해지지 못한 것들이 남긴 흔적에 주목하는 단편들을 묶고 있다. 염승숙의 소설은 죽음 이후, 관계 이후, 사건 이후에 남겨진 감정과 사물, 기억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데에 집중한다.


『그리고 남겨진 것들』에 실린 작품들은 화려한 사건보다는 상실 이후의 공기, 말로 정리되지 않는 감정의 잔여물을 조심스럽게 다루며, 독자로 하여금 ‘무엇이 남았는가’를 계속해서 묻게 만든다. 〈습〉은 이 소설집 안에서도 기억과 망각, 경청과 외면이라는 문제를 가장 상징적인 방식으로 풀어낸 작품에 해당한다.



작품 스타일


염승숙의 소설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설정을 통해, 매우 현실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데에 특징이 있다. 그의 작품 속에는 종종 기괴하거나 낯선 이미지가 등장하지만, 그것들은 충격을 주기 위한 장치라기보다 감정과 사유를 시각화하기 위한 은유로 기능한다.


염승숙은 기억, 상실, 관계의 단절, 듣지 못함과 말해지지 않음을 중요한 주제로 삼으며, 인물들이 그 안에서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문체는 비교적 절제되어 있고, 독해를 과도하게 방해하지 않는다. 대신 설정을 통해 독자를 사유의 자리로 이끈다.


다만 때로는 설정의 밀도에 비해 서사적 결속이 충분히 강화되지 않아, 메시지가 흩어지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염승숙의 소설은 ‘기억해주는 일’과 ‘들어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집요하게 환기시키며, 사라진 이후에 남겨진 것들에 대한 애도를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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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中 [습] 감상


습한 세계에서 벌어지는 장례


〈습〉은 사이버 장례식을 대행하는 신종 사업체에서 일하는 화자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서 죽음을 처리하는 직업, 그리고 허리에 소나무가 자라는 기괴한 질병을 앓는 아버지. 이 소설은 처음부터 비현실적인 설정을 전면에 내세운다. 화자는 한 여성의 사이버 장례를 치르며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그 과정에서 ‘습한 것’, ‘잊혀지는 것’, ‘들어주는 것’이라는 키워드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습한 날씨, 젖은 수건, 몸에 돋아나는 소나무 같은 이미지들은 모두 관리되지 않으면 위험해지는 것들로 제시된다. 반면 바리캉, 좋은 날처럼 사라지고 잊혀지는 것들은 어딘가 서글픈 감정을 남긴다. 이 모든 설정은 ‘들어주는 귀’가 사라진 세계에서, 기억과 경청의 부재가 어떤 괴이한 결과를 낳는지를 은유적으로 보여주려는 장치처럼 보인다.



잊혀지고 싶은 마음과 잊히는 것의 슬픔


이 소설이 흥미로운 지점은 ‘잊혀지고 싶다’는 욕망과 ‘잊혀지는 것은 슬프다’는 감정이 동시에 제시된다는 점이다. 화자는 사이버 장례를 치르며 “제 발자국이나 흔적 같은 것들을 죽은 후에 장례를 치르듯 모조리 처리하고픈 마음이 들 수도 있겠구나”라고 말한다. 이 문장은 현대인이 느끼는 피로와 과잉 노출의 감각을 정확히 짚어낸다. 그러나 동시에 화자는 “사라지는 것은, 잊혀지는 것은, 어떤 의미로든 슬픈 것”이라고 말하며, 망각에 대한 분명한 아쉬움도 드러낸다. 이 상반된 감정은 소설 전체를 관통한다. 지워지고 싶지만, 완전히 잊히고 싶지는 않은 마음. 〈습〉은 바로 이 모순된 정서를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펼친다.



듣지 못하는 세계에서 자라나는 것들


이 소설에서 ‘귀’는 단순한 신체 기관이 아니다. 잘 들어주는 태도, 타인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감각을 상징한다. 등에 귀가 달려 있다는 설정은 처음에는 기괴하지만, 곧 그것이 “생각보다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다”라는 인식으로 전환된다. 잘 듣는다는 것은 부담이지만, 동시에 필요한 일이다. 반대로 듣지 않음, 외면함, 부정함이 쌓인 자리에 습기가 더해지면, 소나무 같은 흉측한 뿔이 자라난다. 이 기괴한 설정은 과장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꽤 직설적인 은유다. 타인의 말을 듣지 않고, 기억하지 않고, 고통을 외면하는 사회가 결국 어떤 괴물을 만들어내는지를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부자의 관계와 애틋한 부정


이 소설에는 아버지와 화자의 관계가 중요한 축으로 등장한다. 두 사람은 서로를 위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고통을 감추기 위해 상대의 고통을 부정한다. 이 애틋한 부정의 관계는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가장 정서적으로 구현하는 장면들이다. ‘무엇이든 잊지 말자, 기억하자, 들어주자’라는 메시지는 이 부자의 관계를 통해 가장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동시에 이 소설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오늘날의 사람들, 듣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사회에 대한 아쉬움까지 담고 있는 듯하다.



설정의 풍부함, 그러나 느슨한 결속


다만 이 소설이 끝까지 설득력을 유지하는지는 다른 문제다. 꽤 긴 분량 속에 다양한 설정과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그것들이 ‘습’이라는 하나의 제목 아래 단단히 묶이는지는 다소 의문이 남는다. 각각의 설정은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사건과 사건 사이의 연결고리가 충분히 강화되지는 않는다. 이것이 작가의 의도일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독자를 끝까지 관통하는 주제적 힘은 약하게 느껴진다. 설정은 풍부하지만, 그 설정이 하나의 강한 울림으로 수렴되지는 못한다는 인상이다.



문장과 제목 사이의 간극


문장 자체는 전반적으로 가독성이 좋고 무난하게 읽힌다. 과도하게 실험적이지 않으며, 설정을 설명하는 데에도 큰 무리는 없다. 다만 ‘습’이라는 제목이 소설의 전체 내용을 충분히 아우르지 못한다는 느낌은 남는다. 그에 비해 소제목들은 각 장면과 내용을 비교적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어, 오히려 소제목이 이 소설의 흐름을 붙잡아 주는 역할을 한다. 제목과 내용 사이의 간극이 아쉬움으로 남지만, 그만큼 이 작품이 가진 문제의식과 시도가 분명히 느껴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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