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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Oct 15. 2020

상사의 말은 다 맞는 것인지


1. 열심히 보고서를 준비했다. 어떤 그래프를 넣을까, 어떤 표를 넣을까, 자료의 구성은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몇 날 며칠을 고민한 끝에 보고서를 완성했다. 상사에게 들고 갔다. 자료가 빈약하다고 한다. 그래서 어디서 확보했는지 알지도 못할 자료를 던져주며 추가하라고 지시를 한다. 전혀 상관이 없는 자료는 아닌 거 같긴 한데, 그렇다고 보고서에 반드시 넣어야 할 자료도 아니고, 필요한 자료도 아닌 거 같다. 어쩌랴. 회사생활이 그렇지. 차라리 자료를 주고 수정하라는 게 낫지,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리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드니까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수정하라”는 지시보다야 낫겠지 생각하며 하라는 대로 자료를 추가하고 구성도 변경해서 다시 보고를 했다. 수정하라는 대로 수정해서 들고 갔더니 자료가 어색하고 구성이 이상하다고 한다. 이상해질 걸 모르고 지시를 하신 건가 하는 의구심과 더불어 또다시 수정을 하라는 지시가 내려올까 봐 조바심도 생긴다. 초안을 작성할 때 충분히 고려하고 고민했던 내용을 수정하라고 하니 억울한 생각도 든다. 나만큼 많이 고민해보지 않으셨을 텐데, 잠깐 보고 저렇게 수정하라고 하면 자료 자체가 엉망이 될 거 뻔한데라는 생각과 말이다.


2.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 여론 조성이 필요해 기고문을 작성하였다. 어떤 예를 들고, 어떤 자료를 인용해 기고문을 작성하여야 할지, 어떠한 흐름으로 논리를 전개하여야 더 설득적일지, 마지막 문단은 어떻게 맺어야 오랫동안 뇌리에 남는 글이 될 수 있을지 고민 고민 끝에, 그리고 주어진 분량에 맞추어 기고문을 작성하였다. 초안을 작성하여 상사에게 보고하였더니 줄이 좍좍 그어지고, 문단의 순서도 바꾸라고 하고 끝맺음도 바꾸라고 한다. 경험이 많고 좀 더 많은 정보를 알고 계시기 때문에 수정하는 게 맞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수정하다 보니 원래 가지고 있던 생각의 흐름과 논리의 흐름이 흐트러져버렸다.  앞뒤가 안 맞아버려 횡설수설하는 글이 되어버렸다. 더군다나 이것저것 추가하고 수정하고 하다 보니 언론사에서 요구하는 분량을 한참 넘어버렸다. 내용도 이상해져 버렸고 형식도 이상해져 버렸다. 한숨이 나온다.


회사에서 일을 할 때면 담당자가 여러 가지 자료를 통해 초안을 작성하고 상급자가 이를 수정하라는 지시를 하는 게 일반적이다. 직급별로 각자의 역할이 있고 해야 하는 롤이 있다. 당연히 초안은 수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초안이다. 최종안이 되기까지 많은 검토를 해야 한다. 초안이 최종안이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초안의 내용 자체가 부실한 경우도 있고, 경험과 정보가 부족해 미처 삽입하지 못한 내용이 있을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 좀 더 많은 경험과 정보를 바탕으로 자료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잡아주고 추가도 해주고 수정도 해주는 게 상급자, 상사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회사에서 담당자로서 일을 할 때는 어떻게 하는 게 효과적이고 효율적인지 많은 고민과 생각 끝에 일을 하곤 한다. 이렇게 했을 때의 장단점과 저렇게 했을 때의 영향 등등을 고려하여 말이다. 하는 일마다 일일이 SWOT분석을 하지는 않겠지만, A로 할 때와 B로 할 때 비교를 통해서 최적이라고 생각되는 결론을 내곤 한다. 성의의 문제는 있을 수 있고, 열심의 문제는 있을 수 있다. 시간이 부족해서, 혹은 의욕이 부족해서 대충대충 자료를 작성할 때도 물론 있다. 그러나 보통의 상식에서 월급루팡이 아닌 이상 여러 가지 요소들을 다양하게 고려한 후에 자료를 작성하는 게 일반적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해당 자료를 검토하는 상급자의 입장에서는 자료를 수정하라고 지시를 할 때 좀 더 깊게 바라보고 좀 더 넓게 바라볼 수는 있으나, 이 자료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어떤 생각으로 작성했는지는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활자화된 자료 자체를 검토는 할지언정 활자화하기까지의 과정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왜 여기에서 이 내용이 나왔는지, 왜 다음 장에서는 그래프를 넣었는지 생각하지 못하고 그래프가 맞니 안 맞니만 보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특히 개조식의 보고서를 작성할 때보다 서술형의 글을 써야 할 때 많이 발생한다. 물론 원래 글이란 게 그렇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글을 쓸 수도 있고, 저렇게 글을 쓸 수도 있다. 어떤 콘텐츠를 가지고 글을 구성할지도 각자의 경험과 각자의 지식이 다르기 때문에 조금씩 다를 수 있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러나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인 글의 앞뒤 흐름은 맞아야 하고, 정해진 규격에도 맞아야 한다. 일의 흐름과 경과를 설명하는 다음의 문장의 전개에는 “하지만”이 아니라 “따라서”, 혹은 “그래서”가 어울린다. “하지만”이 아니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그래서”가 아니라 “하지만”으로 수정하라는 지시가 내려올 때가 있다. 이 문단에서 왜 이러한 내용을 전개했는지 전체 글의 구성도 함께 봐야 하는데 앞 뒤의 글자만 보고 엉뚱한 접속사를 넣으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분명히 정해진 글자 수가 있는데 상급자는 본인이 아는 정보를 총동원하여 이것도 넣고 저것도 넣으라고 하니, 곤란한 상황에 처해질 수밖에 없다. 이것도 넣고 저것도 넣으니 분량을 초과하여 아예 반려를 당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 심지어 수정하고 수정하고 수정하다 보니 결국 초안으로 돌아가는 일도 생긴다. 무엇을 위해 돌고 돌아 원점으로 왔을까, 결국 뻘짓하느라 시간을 허비했다라는 생각이 아니 들 수가 없다.


이러한 부당한(?) 어색한(?) 수정, 지시 요구에 맞서는 자세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열심히 설명하는 것이다. 이건 이래서 이렇게 했고, 저건 저렇게 해서 저렇게 했고 열심히 설명, 설득을 해 본다. 먹히면 다행이다. 먹히지 않을 때는 큰 문제이다. 먹히지도 않을 설명하느라 시간 버리고 내 기분만 상한다. 반면 수정하라는 지시에 군말 없이 알겠습니다 하고 수정하는 것이다. 상사가 하는 말이니 맞겠지, 혹은 설명해도 설득이 안될 테니 시키는 대로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자니 자료를 만들기까지의 고민과 자신감이 가치가 없어져버리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래도 저래도 결국 어려운 상황에 처하는 건 마찬가지이다.


개인적으로 글을 써야 하는 일이 많은 업무를 하고 있기에 특히 글쓰기에 대한 고민이 많다. 누가 보더라도 그럴듯하고 누가 보더라도 잘 쓴 글이 물론 있을 수 있겠지만 전술했듯이 글이란 게 사실 생각을 전개하여 활자화하는 일이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에 모두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나 스스로는 잘 썼다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상사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물론 수정 지시에 대해 수긍이 가는 경우가 많지만 간혹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어 갈등이 생겨버린다. 가끔씩은 김영하 작가나 이문열 작가, 유시민 작가가 우리 회사에 온들 윗사람의 입맛에 딱 맞는 글을 쓸 수 있을까, 우리 회사에서 일하면 글 잘 쓴다라는 얘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엉뚱한 생각마저 들 때가 있다.


사람과 사람이 함께 일을 하다 보니, 이런 생각과 저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모여 같이 일을 하다 보니 생각이 다를 때가 생긴다. 상사와 부하라는 직급에만 갇혀서 상사가 하는 말이 다 맞다라고 하기에는 억울한 경우가 많다. 결과만 보지 말고 과정도 함께 봤으면 좋겠고, 글자만 보지 말고 글자를 쓰기까지의 생각을 봐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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