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월 구일. 시드니 주립 미술관
멋진 저녁을 먹은 다음 날 우리는 숙소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시드니 주립 미술관을 오늘의 첫 방문지로 정했다. 숙소보다는 다른 더 유명한 관광지를 기준으로 위치를 설명한다면 로열 보태닉 가든스 아래에 있다. 아무튼 숙소 하나는 잘 잡은 것 같다. 시드니의 유명 관광지가 모두 도보 거리 안에 있으니 말이다.
20분 정도 도로를 걸으면 시드니 주립 미술관 후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길을 따라 걸으면 바로 웅장한 정문이 나온다. 순간 여기가 유럽인가, 싶을 정도로 웅장한 신전과도 같은 정문이었다. 거대한 기둥 여섯 개가 떠받치고 있는 입구다. 이 미술관은 호주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미술관이라는데, 외관의 양식이 르네상스 양식이라고 한다. 르네상스 양식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인간중심주의를 되살리는 시대이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고대 그리스가 많이 느껴졌던 것 같다.
이 시드니 주립 미술관은 무료로 피카소와 반 고흐, 모네 등 세계적인 거장들과 호주를 대표하는 여러 예술가의 작품을 무료로 전시하고 있다. 꿀팁으로는 매주 금요일에 진행하는 한국어 무료 투어가 있다고 하니 요일을 잘 맞춰 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알라와 나는 다 방문하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이라 조금 아쉬웠다.
미술관은 지하 3층과 2층, 1층, 그리고 지상 1층으로 총 4층으로 구성됐다. 지하 3층은 호주 원주민에 관련된 예술 작품을, 지하 2층은 현대 미술 중 설치 미술을 볼 수 있다. 지하 1층과 지상 1층이 가장 익숙했는데, 지하 1층은 동양 예술 작품이, 지상 1층에는 서양 미술품이 전시돼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사진첩을 보면 지하 3층과 2층 사진은 거의 없다. 다만 지하 2층 설치 미술을 보면서 남긴 느낀 점을 메모장에서 찾을 수 있었는데, 뭘 표현한 거지? 라는 딱 한 마디가 적혀 있었다. 어지간히 예체능 머리는 아닌가 보다.
지하 1층 동양 전시관을 천천히 구경하면 주로 불교와 도교에 관련된 미술품이 많이 보였다. 어떻게 보면 오리엔탈리즘이라고도 누군가는 해석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동양적인 무언가를 서양인의 시선으로 왜곡하는 전시는 찾을 수 없었다. 종교적 믿음에 관한 예술품이 많아 그 안에 제국주의적 요소를 넣기에 애매할 수 있겠지만, 조금이나마 가질 수 있었던 불안함을 지우고 편안하게 전시를 관람할 수 있었다.
지하 1층을 둘러보다 보면 빔프로젝터와 함께 상영되던 영상과 흥겨운 불교 목탁 두드리는 소리가 함께 들리곤 했다. 마침 시드니 주립 미술관을 방문했을 때 입었던 옷이 지난번에 자라에서 샀던 꼬까옷이라 더욱 기분이 좋아진 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서 알라 앞에서 혼자 즐겁다고 몸을 이리저리 리듬에 맞춰 흔들거렸다. 관객이 많았다면 부끄러웠겠지만, 어차피 알라 혼자 관람했으니 상관없다. 꼬까옷은 뽀송뽀송했고 기분은 흥겨웠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지하 1층에서 지상 1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걷는데, 문득 옆에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사진을 찍으면 잘 어울릴 것 같은... 자라에서 산 내 꼬까옷이 내 기분을 말도 안 되게 흥겹게 만든 탓이다.
후다닥 자리를 뜨고 지상 1층으로 가자 얼마나 높은지 모를 정도로 커다란 전시관이 알라와 나를 반겨줬다. 어디선가 많이 봤고 느낌도 여기저기서 많이 느껴본 작품들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피날레 작품은 전시관의 맨 끝에 있었는데, 앞서 말한 것처럼 피카소의 작품이었다. 피카소의 작품 두 점이 전시돼있어 그 앞에서 짧은 큐레이션이 이뤄지고 있었다. 확실히 피카소의 작품을 학교 미술 시간과 그 외 미술품 중에서 가장 많이 봤던지라 봤던 작품 중에서 가장 익숙했다. 그 외 이렇다 할 감상이 없었다는 걸 생각하면 정말이지, 어지간하게 예체능 머리는 아니다.
피카소 작품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조금 더 풀어진 날씨에 힘입어 정문 앞에서 사진을 찍고 우리의 다음 장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