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욕의 세월
불암산 자락에서 바라본 수락산 너머에는 겹겹이 산들이 쌓여 있다.
완만하게 이어진 산등성이들은 구름과 맞닿아 있어, 북쪽 땅인지 남쪽 땅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멀리 회색 산등성이 앞에 있는 검회색 산 아래에 양주시가 있다. 인구 23만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양주시. 저 도시의 빌딩과 도로 사이에 무수히 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낮잠을 자는 이, 학교에 간 친구, 회사에 있는 사람과 가족과 함께 먹을 것을 구하는 이들. 모두 각자의 소명을 다 하느라 바쁘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무언가 외로워 보이는. 배가 약간 나오고, 얇은 팔 다리의 남자. 날렵한 몸매를 자랑하던 때도 있었겠지만, 저기 안드로메다에 살다 온 ET처럼 생긴 남자. 어릴 때 자기보다 머리 큰 아이가 전교에 한 명 밖에 없었다는, 운 좋은 남자다. 한 명이라도 없었으면, '대갈 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것이다. 이 남자. 갑자기 배가 부풀어 오른다. 자세히 봤으니, 배가 부풀어 오르는 걸 알지. 대충 보면 안 된다. 이미 부풀어 있는 배라서.
"휴~, 이게 얼마 만이여, 에이, 니미, 씨부럴, 젖도, 썅, 기분 좋으네"
산에 와서 욕이라니.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이 남자는 버릇이 하나 있다. 술을 좀 먹으면, 음 그러니까.. 꼭지가 돌도록 먹으면, 실실 웃으면서 욕 4종 세트를 날린다. 이놈의 욕은 그냥 입에 달려서, 지하철 내려 집에 걸어가는 길에 줄줄줄줄 흘러나온다. 그런 날은 간땡이가 부어서, 집에 들어갈 때도 욕을 하는데. 음, 당연히, 말 안 해도 알겠지만. 욕에 욕을 됫박이로 되돌려 받는다. 누구한테? 당연히 와이프한테. 왜 욕을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제도, 그런 날이었다. 꼭지가 돌도록 술을 먹고, 욕 4종 세트를 날리면서 집에 들어갔다가, 바가지로 욕을 먹고 잠이 들은 날이었다. 그런 날은 꿈도 안 꾸고 늦게까지 잠을 잔다. 그런데, 이 남자. 빨리 일어났다. 왜? 와이프가 동네에 계신 친구분들과 진주 여행을 가시는 날이라, 당연히 빨리 일어나서 배웅을 해드리는 게 의무니까. 사랑의 표현이라고 할까. 아침 일찍, 배웅을 해드리고, 다시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이 남자도 짐을 싸고, 김밥을 사고, 물을 사서, 최불암 아저씨의 시가 적혀 있는 불암산 산자락을 걸어 오른 것이다. 뭐, 그냥, 그렇게 이유 없이 산행을 할 수도 있는 거니까. 산이 끌어당겼다고 해야 할까, 오래간만에 혼자 있는 시간이 좋았다고 할까, 아니면, 저~기 저, 내면에서 올라오는 외로움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할까.
그렇게 불암산 정상 근처에 와서, 수락산을 바라보며, 욕 4종 세트를 날린 거다. 산에 와서 욕이라니.
그는, '저길 가?'하는 갈등이 느껴질 정도로 수락산을 한참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러더니, 휴~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오른 편으로 돌린다. 불암산의 괴석들이 그의 눈에 들어온다. 하늘과 맞닿은 큰 바위에서 아래로 아래로 하나씩 쓰다듬으며 내려온다. 갈색 눈동자의 시선이 멈춘다. 그의 눈에, 큰 바위 틈에 있는 작은 돌조각이 들어온다. 그 작은 돌은 천 배는 더 큰 바위들 사이에서 그들을 지탱하고 있었다. 무슨 조화가 있어, 이 큰 바위들이 여기 산꼭대기에 있으며, 그 사이에 저 작은 돌이 이들을 지탱하고 있는 것인지.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하던 그가, 욕 4종 세트를 다시 내뱉었다.
"에이, 니미, 씨부럴, 젖도, 썅!!"
옆을 지나가던 한 무리의 아줌마들은, '뭐시, 욕을 하구 지럴이여' 하는 표정으로 흘겨보며 지나간다. 그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다. 그는, 진정 마음이 넓은 사람이다. 웬만 해선, 넘들이 해달라는 건 다해주는 사람이다. 누가 욕을 하더라도, 뒷다마를 까더라도, 속으론 어떨지 모르나, 겉으로는 그런가보다 하는 사람이다. 웬만해선, 그를 다 친구처럼 생각한다. 까마득한 후배도. 그런,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갈등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변했다. 이전 같으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갈 일이다. 그런데, '뭐여, 왜 쳐다 보구 지럴이여' 하는 눈 빛을 보낸다. 도전과 응전의 눈 빛이 크로스한다.
혐오와 혐오가 서로를 마주 보려는 찰나, '까~악' 하는 까마귀 소리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 까마귀 한 마리가 날개를 푸덕이며 하늘로 떠 올랐다. 시끄럽네, 하는 생각을 하던 사이, 아줌마 무리의 뒷모습만 보인다. 뻐기는 듯 눈꼬리가 올라가고 코가 벌름 걸렸지만, 눈 밑 언저리에서 떨림이 일어난다.
다시 불암산 자락의 기암괴석으로 눈을 돌렸다. 큰 바위돌 사이에 낀 작은 돌을 촛점 잃은 눈으로 응시한다. 독일 슈타인가텐이 그의 머리 속에 떠오른다. 그곳,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알프스 초원의 목가적인 풍경, 바람 소리, 구름다리 아래 까마득하게 흐르던 깊은 계곡. 그 아름다움에 빠져, '눌러 살아버릴까' 생각했었다. 그건 꿈, 안될 소리. 그 여행은 출장이었다. 뮌헨과 슈타인가텐을 즐긴 것으로 즐거움은 끝났다. K 전무가 오후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선발대 네 명은 K 전무 일행을 공항에서 맞이했다. 뭐, 서로 안 가려고 하더니, 막상 시간이 되니 서로 가겠다고 해서 차를 두 대나 끌고 다 같이 마중을 나간 것이다. 하여튼, 사람들 하구는. 가방을 들들들들 끌고 오는 K 전무를 보고, C 팀장은 굽신거리며 달려가 가방을 받는다. 그는, 어, 하고 주춤 거리더니, 쩝 거린다.
"안녕하세요. 전무님.. 피곤하시죠? 헤헤"
"어, 그래. 야 담배 있냐? 담배 한대 피자." 하고 K 전무가 말했다. K전무는 소문난 골초였다. 연초며 전자담배며, 전혀 가리지 않는다.
"아, 네. 연초로 드릴까요?" 하고 C 팀장이 말한다.
"야, 나도. 하나 주라" 하고 옆에 있던 A 상무도 끼어들었다. K전무와 함께 비즈니스 석을 타고 직행으로 날라왔다. 여자 팀장인 D만, 이코노미 석에 앉았다. D는 표정이 어둡다. 입 꼬리가 내려가서 올라오질 않는다. 아, D는 원래 입 꼬리가 내려가 있었지.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끊은지 몇 년 지나서, 언제 적에 피웠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건강에 안 좋다는 둥, 입에 냄새가 나서 싫다는 둥, 아침에 못 일어나서 끊었다는 둥.. 뭐, 그랬지만.. 다 거짓말이다. 와이프가 기습적인 용돈 인하를 단행했다. 담배를 살 수가 없어서 끊을 수밖에 없었던 거다. 좀 만 올려달라는 시위를 몇 번 하긴 했으나, 어림없는 소리. 결국은 담배를 끊고 밥을 먹어야 했다.
두 대의 차에 7명이 나누어 탔다. 그는 K 전무 와 같은 차를 타고 뮌헨의 숙소로 이동했다. 그놈의 담배는. 이 인간들은 차 안에서 담배를 피운다. 젠장, 세 명이 다 담배를 피네. 안 그래도 비염이 심한 그는 겨우 숨을 헐떡였다. 호텔에 도착하고, 10분 후 집합. 저녁 시간이다. K 전무는 로컬 음식을 좋아한다. 이름난 식당은 이미 몇 군데 예약을 했다. 혹시나 마음에 안 들어 하면, 곤란하니까. 그중에 한 군데로 가고, 나머지는 취소를 했다. 마리엔 광장의 아우구스티너. 저녁은 학센과 몇 가지 음식, 그리고 맥주다. 맥주가 끝도 없이 나온다. 그렇게 몇 시간을 보냈을까? 호텔로 돌아오는 길. 어쩌다, K 전무 옆에 그가 있었다.
"어, 너, 그거 잘 만들고 있지?"
"아, 네.. 인공지능 플랫폼 말씀하시는 거죠? 프라이빗 클라우드에 GPU 기반으로 설계하고..."
"아, 아, 잠깐... 기반이 뭐야? 응?"
"네? 네.. 아, 기반이라는 건.. "
"다시, 기반이 무슨 뜻이야.. "
"네... 기반은.. "
"말 똑바로 해,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GPU 기반이라니.."
"..."
"나는 말이야.. 용어가 중요해, 응, 잘 써야 돼.. 잘 못 쓰면.. 한 줄 도 못 나가.. 진도를 못 나가.. 응.."
"아, 네.."
에이 씨, 하는 생각을 하며, 그는 마지못해 엉거주춤 대답했다. K 전무의 새까만 검은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쥐를 닮았다. 전무가 담배연기를 퓨하고 내뱉는다. 직선으로 뿜어나오던 연기는 어느새 아련하게 피어오른다. 그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술 때문인지, 아니면 전무의 말 때문인지, 눈길 때문인지 알 수가 없다. 그의 갈색 눈동자가 흔들리며 시선을 둘 곳을 찾고 있다.
그렇게 시작한 출장은 피곤함의 연속이었다. 매일 아침 미팅을 하고, 점심을 같이 먹고,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밤까지 이어지는 술자리. 메쎄의 전시장은 어찌나 넓은지, 매일 걸어 다닌 거리가 10킬로 육박했다. 안드로메다 ET처럼, 배 나오고 팔 다리 가는 그가 어떻게 버틸수 있으랴. 그는, 거의 녹초가 되었다. 출장 마지막 날, 일행은 메쎄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당연히, 술자리가 펼쳐졌다. 일주일 내내 마셔댄 술값만 하더라도, 기 백만 원이다. 그 넘의 술은.. 아, 이제 좀 그만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가득했다.
"야, 먹어, 마셔. 마지막 날이잖아, 응" K전무가 말했다. 눈치 빠른 C 팀장이 제일 먼저 술잔을 들었다.
"아, 전무님. 한잔하시죠. 캬~, 좋네요. 독일에서 소주라.. " A 상무가 옆에서 거들며 말한다.
"전무님, 어려운 출장이었는데, 전무님의 영도력 때문에 무사히 출장을 마친 거 같네요. 내년에도, 메쎄, 전무님과 같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아, 전무님... 한 말씀하셔야죠."
"아, 그래.. 여러분 모두 수고했어.. 이번 메쎄에 와서, 내가 놀란 게 아주 많아. 응. 4차 산업혁명이 독일에서 시작됐잖아? 알지? 과연,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게 느껴지지 않아? 다들 봐서 알겠지만, 100년 이상 전통이 있는 박람회야. 응, 축구장 만한 전시장이 수 십개가 넘고.. 많이 배웠지? 우리, 내년에도, 같이 오자고. 자자 자, 한 잔들 해~, 그렇지.. 그렇지, 자, 그리고.. 자기들도, 한 마씩 해~ 응"
일주일 내내 마신 술 때문인지 금세 취기가 올랐다. 튀어나온 배와 가는 팔다리가 눈에 띈다. 거기다, 원래 큰 대갈, 아니, 머리가 취기가 올라 붉어지면서 돋보인다. 모두들 한 마디씩 하고 그의 차례가 돌아왔다.
"이번 메쎄 여행, 아.. 출장은 배울게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전통적인 장비 업체들이 IT 기술을 기반으로.. "
"아, 잠깐.. 기반이 뭐야, 응? 기반이라는 말을 거기다 쓸 수 있는 게 아니지? 안 그래.. A 상무"
"아, 네.. 그렇죠. 거기다 간, '사용' 이라는 말을 써야죠.."
"야, J PM은 말이야.. 이게 여행이냐? 야, 그런 마음으로 왔구나.. 응"
"아, 네.. 죄송.. "
"아 됐고, 너, 말이야.. 다음 주 월요일에 지금 하고 있는 일 나한테 보고해.. 솔루션 이름도 정해야 하고, 사장님 보고 준비도 해야 하니까.."
"아, 네.. "
그의 한 마디는 그렇게 대충 마무리가 됐다. 어차피, 형식적인 말들이었지만, 그는.. 돌아오는 뮌헨 항공의 좁은 이코노미석에서 기반이라는 말을 곱씹었다. 도대체 그놈의 기반이 왜 거기서 튀어나왔고.. 전무는 왜 그리 집착을 하는지... 눈을 감았다. 졸음이 몰려왔다. 눈앞이 흐려졌다. 경춘선 숲길이 떠올랐다. 그 길에 있는 아름다운 플라타너스 와 끝없이 이어진 선로가 생각났다. 서울에 돌아가면, 이제는 공원이 된 경춘선 숲길의 선로 옆을 걸으리라.. 그리곤 그 길을 걸었다. 한 여름의 시원한 바람에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선로는 끝없이 이어졌다. 평행선을 이룬 선로를 따라 시선을 옮긴다. 일직선으로 뻗은 선로는, 겨우, 시선이 닿을 만한 끝자락에서야 소실점을 이루었다.
"레디슨젠틀맨, 위아 얼라이빙 ... "
이런, 젠장.. 8시간 15분을 내리 잠만 잤다. 밥도 못 먹었는데, 벌써 도착이라니.. 침을 흘리며, 떨구었던 고개를 들었다. 멍한 갈색 눈동자가 껌뻑인다. 토요일 아침 7시다. 하... 그 넘의 보고는.. 일요일에 출근할 생각에 머리가 아파진다.
월요일. 그는 아직 시차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토요일 새벽에 도착한 후로 제대로 쉬질 못했다. 오랜만에 와이프와 마트에 갔다. 물론, 그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와이프가 가자는 데, 당연히 가야지 하는 표정을 보였다. 그래도, 와이프한테는 눈치가 좀 있는 편이다. 18년이나 같이 살았고, 결혼과 동시에 힘의 균형이 깨지면서, 잘 살아보겠다는 의지가 그의 내면에서 꿈틀대며 깨어났던 것이다. 일요일엔 출근해서, 그 넘의 보고서를 끼적끼적 만졌다. 출장을 다녀온 주말에 일을 하러 나오다니.. 앞서 말했지만, 그는 참 운이 좋은 편이다. 어려서부터. 주말은 참 일하기가 좋다. 아무도 없고, 조용하니, 방해할 사람이 없다. 그는 역시 운이 좋은 거다. 끼적끼적 만진 보고서를 전무에게 보고해야 한다. 전무의 전용 회의실에는 기획팀장과 프로젝트 파트리더인 Y가 미리 배석해있다. 그는 프로젝트의 PM이다. 컴퓨터와 빔을 연결하고, PPT 보고서를 띄어두었다. 비서가 전자담배와 아메리카노를 가져다 놓는다. 전무가 들어왔다.
"자, 봅시다." 하는 말을 하며, 그는 전자담배를 물었다. 은색 줄이다. USB처럼 생겼다. 전무의 입에서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네, 전무님. 보고드리겠습니다. 일전에 기획안에 대해서 보고를 드렸고, 당시 지시하신 사항들을 반영했습니다. 먼저, 지시하신 사항들이.. "
"아, 알았고.. 그거 이름은 뭐로 하기로 했지?"
"아, 네.. 작명을 하는 데, 의견을 좀 받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설문조사를 좀 돌려.. "
"아니, 이름은 뭐로 하기로 했냐고.. 설문조사는 뭐.."
"아, 네.. 이름이 세 가지 안이 나왔습니다. 이게 아무래도 GPU 기반의.. "
"아, 기반.. 그거 좀, 거기서 왜 기반이 나와, 응, 도대체 몇 번 얘기를 해야 하나. 기반이 아니라고, 사용이라고. 용어를 좀.. 조심해서 사용해봐. 응,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응? 반항하는 거야?"
"아, 아닙니다. 놀리다뇨.. 죄송... 합니다. 이게 습관이 돼서.."
"아, 죄송이고 뭐고, 됐어. 이봐. Y. 당신이 보고해.."
"아, 네.."
"전무님, 커피 한잔 드시면서 보고 들으시죠. 더치로 준비했습니다. 아, 그리고.. 줄은 실버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이번에 하나 샀어요. 요게, 아주 맛이 끝내줍니다." 기획팀장이 눈치를 보다, 슬쩍 끼어들었다.
"아, 그래? 어쩐지 맛이 좋다 했어.."
...
"자, 그럼. 이번 금요일에 사장님 보고를 잘 해봅시다. J PM은 오늘 리뷰 내용 반영해서, 보고서 잘 준비하고.. "
"네, 전무님"
"PM 님, 목요일에는 사장님께 서면으로 보고서를 보내야 해요. 그래서, 수요일 최종본을 전무님께 보내주셔야 되고요. "
"그렇지, 기획팀장이 그런 건 좀 챙겨"
"아, 네.. 전무님"
보고를 마치고, 그는 큰 대가.. 아니, 머리를 어디 갖다 박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에이, 기반이라니. 왜 또 튀어나와서. Y PL 덕분에 보고는 그래도 잘 끝났다. 전무가 Y PL을 칭찬할 때, 그는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다. 그 정도야, 이미 많이 겪었기 때문에, 너끈하다. 앞서 말했지만, 그는 워낙 마음이 넓어서, 후배들도 친구처럼 대한다. Y PL은 보고를 마치고, 그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스벅 아메리카노를 한 잔 가지고 왔다. 그는 사람 좋은 웃음으로, 흡족하게 웃으며 커피를 받았다. 그리고, 기분 좋게,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하지만, 과연 기분이 좋을까. 당연히 아니다. 그의 마음에는 강원도의 산골처럼, 한 겨울의 눈발이 날리고 있다. 아무도 없다. 그의 가슴에는 새하얀 눈만 쌓인다. 마치, 눈 오는 풍광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그의 갈색 눈동자는 아련하다. 외로움이 묻어난다.
시간은 빠르다. 오늘은 금요일, 이제 5분 후면 사장님 보고다. 경영회의실에는 그와 전무, 기획팀장, 그리고 CSO 가 배석했다. 음료수와 사장님 전용 커피가 세팅되어 있다. 사장님은 시간을 매우 잘 지킨다. 소문으로는 회의에 5분 늦게 들어온, 모 상무를 집에 보냈다고 한다. 아, 그 권위라니.
갑자기, 문이 열렸다. 비서가 "사장님, 오십니다." 하고 말한다.
사장이 들어왔다. 회의 석상의 사람들은 모두 일어선다. 사장의 왼손에는 서류 뭉치를 들었다. 서류 뭉치 위, 손목에는 은색의 메탈 손목시계가 반짝인다. 팔을 흔들 때마다, 손목시계는 와이셔츠의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한다. 풀려있는 와이셔츠 위 단추 사이로 살집 없는 목이 길게 솟아있다. 각진 턱에 얇고 앙다문 입술이 양옆으로 길게 뻗어 있다. 입꼬리가 아래로 쳐져 있다. 뾰족한 코 날 위에 긴 눈을 가지고 있다. 쥐 색 눈동자가 반짝거린다. 은색의 각진 안경과 어우러져 눈동자가 더 검게 보인다. 그 검은 눈동자 위로 시원하게 벗 거진 머리에 흰색 머리카락이 좌에서 우로 길게 넘어가 있다. 시원하게 벗 거진 머리가 가려질까마는, 사람은 누구나 부여잡고 싶은 게 있는 법이니까. 긴 회의 탁자의 중앙에 서류 뭉치를 내려놓고 앉으며 말한다.
"더운데, 다들 잘 지냈소.. 이번에 출장 잘 다녀왔두만.. 그래 어땠소.."
"아, 네.. 덕분에 출장 잘 다녀왔습니다. 독일이 역시 4차 산업 혁명의 강국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전시회였습니다. 20여 개의 전시장이 만들어졌는데, 전시장 하나가 축구장 하나 크기만 합니다. 거기에 글로벌 각국의 업체들이 참여를 했어요. 약 십만 개의 업체인데요. 저희는 주로.. 장비에 IT 기술을 접목한 스마트 팩토리 업체를 탐방을 했습니다. 배울게 아주 많았고.. 이건, 추후에 별도로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K 전무가 간략히 설명했다. 매일 술 먹고 정신없어, 본 것도 없을 텐데.. 말발 하나는 끝내준다.
"아, 그래.. 그러소. 그럼, 오늘 내용 봅시다."
"네.. J PM 보고하세요."
"네, 본 프로젝트 PM 을 맡고 있는 J입니다."
"본 프로젝트는 인공지능 플랫폼을 구축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플랫폼은 이미지, 음성, 텍스트를 딥러닝 기술을 사용하여 분석할 수 있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저희는 플랫폼만 만들고, 이 플랫폼을 통해서 딥러닝 알고리즘으로 만든 모델을 서비스 제공자와 사용자가 거래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비즈니스 모델로 합니다. 총 기간 8개월에 총비용 98억을 소요되.. "
"아, 그래.. 비용이 98억이 들어. 뭘 하길래, 그리 많이 들지?"
"아, 네.. 이게 이미지를 딥러닝으로 분석하려면.. GPU 기반으로.. 이 시스템을 만들어야.."
그의 말을 끊으며, K 전무가 치고 들어온다.
"네, 98억이 좀 많이 들어서.. 이걸 58억으로 줄여서 하도록 제가 지시를 했습니다."
" 58억? 그것도 좀 많지 않나.. 더 줄여봐봐, K 전무.. 응"
"네, 제가 한 10억 정도 더 줄여보겠습니다.. 협력 업체를 비딩을 붙이고, 가격 좀 내고하고.. 뭐.."
"아니, 뭐, 그런 걸 나한테 얘기할 필요는 없고.. 왜 그래.. 다 알면서.., 나랑 일 하루 이틀 하나.. 응, 반석이.."
"아, 네.. 죄송합니다." K 전무가 대답한다.
"그래, 비용은 그 선에서 조정하시고, 뭐, 기능이야.. 반석 전무가 알아서 잘 해.."
"아, 네..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미안한데, 내가 좀 바빠서.. 그만 마칩시다. J PM 수고하소. 우리는 첨 봤나?"
"아, 네.. 처음 뵈었습니다. 제가 작년 8월에 인공지능 전문가로 경력 입사했습니다."
"아, 그래.. 하하, 그렇구만.. 우리 반석이, 아.. 아니지, K 전무 보필해서 잘 만들어보소.."
10분 만에 회의가 끝났다. 거래처 손님이 방문을 했다고 한다. 갑작스레.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난다. K 전무가 사장의 뒤를 쫓아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형님, 요번 주 일요일에 S사와 부킹 한 거 말씀 들으셨죠? 8시에 제가 모시러 가겠습니다."
"어, 반석이.. 알았다. 니 골프 실력은 좀 늘었나? "
"아.. 네, 그냥 그렇죠. 여전히 80개 후반 치죠.. 뭐"
"야.. 니 그래서, 회사서 기반을 닦을 수 있겄나. 응, 80개 후반 쳐서, 언제 기반을 닦고 자리를 잡노.. 이기, 학교 후배라고 잘 땡기줄라 했두만.. 골프 안 치고 뭐 하는 기야. 응, 반석이.. 학교 다닐 때처럼, 한 따까리 해볼까?"
"아, 제가.. 밤새도록 연습해서, 80개 초반으로 만들겠습니다. 죄송.."
"하하.. 야, 농담이여, 농담.. 쫄지마.. 우리 반석이 옛날이나 똑같네.. 연습 잘해서, 대주주 눈에도 띄고, 기반 잘 닦아야지.."
"아, 네.. 그럼요.."
K 전무가 사장을 배웅하고 다시 돌아와서 말한다. 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다.
"J PM. GPU 기반? 너.. 진짜.. "
"죄송합니다. 고치겠습니다.."
"아, 휴.. 됐어. J PM. 미션을 하달하겠어. 돈 줄여서, 담 주 월요일에 보고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아, 이게.. 월요일 보고드리려면.. 지금이 금요일 오전이라.."
"뭐, 어렵다고? 그럼, 하지 말든가.."
불암산의 기암괴석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은 5분이 넘게 작은 돌에 머물러 있다. 앞서 말했지만, 그 돌은 천 배는 더 큰 바위를 받치고 있다. 어찌, 저 큰 바위들이 이 산꼭대기에 올라와 있고.. 그 바위 틈에 저 작은 돌이 있는 것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휴, 하는 소리와 함께 불암산 정상으로 발길을 옮겼다. 정상 바로 아래, 전망 좋은 곳에 다다랐다. 도전과 응전의 눈빛을 크로스 했던 아줌마들이 뭔가를 둘러싸고 있다. 궁금증이 일었다. 그는, 흠흠하며, 뭐가 있나.. 기웃기웃거렸다.
이름이 너무 커서 어머니도 한번 불러보지 못한 채
내가 광대의 길을 들어서서 염치없이 사용한
죄스러움의 세월 영욕의 세월
그 웅장함과 은둔을 감히 모른 채
그 그늘에 몸을 붙여 살아왔습니다
수천만 대를 거쳐 노원을 안고 지켜온
큰 웅지의 품을 넘보아가며
터무니없이 불암산을 빌려살았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최불암, 불암산이여)
최불암의 시가 있다. 불암산이여. 뒤에서 기웃기웃, 시를 바라보던 그의 입에서 무심코, 4종 욕 세트가 흘러나왔다. 그냥, 무심코다. 아무 생각 없이. 무심코.
"에이, 니미, 씨부럴, 젖도, 썅!!"
앞에서 시를 보고 있던 아줌마 무리가 일제히 뒤를 돌아본다. 그중, 약간 장대한 몸집의, 단발머리 뽀글 파마 아줌마가 눈을 흘기며 씩 웃으며 말한다.
"아, 뭐시여. 불만이 그리 많소. 뒤에 따 욕을 해 싸코. 그라지 말고, 일로와 편히 보소."
"아, 예.. 그냥, 욕이.. 나와.."
그의 팔을 잡아당긴다. 앞서 말했지만, 안드로메다에서 온 ET처럼, 대갈..아니 머리 크고 팔 다리 가는, 그가 무슨 힘이 있나. 힘 한번 쓰지 못하고, 아줌마 무리 중간으로 끌려들어 간다. 아줌마들은 시를 보면서도 서로 말이 많다. 어쩌고저쩌고. 아줌마 무리에 끼여있는, 그의 배가 살짝 부풀어 오른다. 흐리멍덩한 갈색 눈동자가 반짝거린다. 부처의 암석이 있는 산. 그 불암산에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