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신 Dec 08. 2020

푸른빛(3/3)

Q-Bot, 영혼의 소리

https://brunch.co.kr/@desunny/100

(앞의 글에서 이어집니다)


문이 열렸다. 그녀의 서재 안, 책장에는 수많은 생명공학 서적들이 꼽혀 있었다. 그리고 책장 한 편에 그녀의 노트가 있었다. 나는 그 노트를 빼내 뒤에서부터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2051년 6월 18일. 그가 꿈 이야기를 했다. 과거의 기억이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어디서 잘 못된 것일까. 그 기억은 삭제되었어야 한다. 메모리 크롭(Memory Crop)에 문제가 있었던 게 틀림없다.」  

   

이게 뭘까? 그, 그녀 글 속의 그는 내가 틀림없다. 나의 어떤 기억이 살아나고 있다는 것인지? 설마…. 나는 앞 페이지로 노트를 넘겨 나갔다. 그녀의 일상과 감정들이 담긴 메모들이 이어졌다.      


「2051년 5월 12일. 그는 요즘에도 새벽에 빨리 일어난다. 늘 악몽을 꾸는 것 같다. 헉헉 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일어난다. 제발 그 일만은 아니었으면…」     


내가 새벽에 악몽을 꾸면서 일어나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별다른 내색도 없이,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니.      

「2050년 9월 8일. 예전의 감정을 느낄 수가 없다. 그가 마치 그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혹시, 내가, 그리고 도영 오빠가 잘 못 선택한 것은 아닐까?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50년 9월. 무슨 일이 있었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다. 50년 9월. 8월. 7월. 6월. 아무 기억이 없다. 왜 이 시기의 기억이 나질 않는 걸까?      


「2050년 6월. 도영 오빠와 제임스를 찾아가기로 했다. 우리는 그가 연구하고 있는 CFG(Cron Fast Growth) 기술을 적용하기로 했다. 물론 알고 있다. 불법이라는 것을. 하지만 나는 그를 살리고 싶다. 제임스의 도움이 간절하다. 제발 그가 도와주기를. 그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녀의 기록은 여기서 끝이 났다. 다른 노트를 찾기 위해 책장과 서랍, 온 방을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다. 도대체 50년 6월부터 9월 사이의 기억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50년 5월, 서울의 도심에서 생활하던 우리는 양평 서종,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했다. 41년 결혼을 하고 거의 10년째에 접어들었지만 우리는 그때까지 아이를 갖지 못했다. 희수는 아이를 갖기 원했고 서울의 복잡한 도심에서는 아무래도 아이를 갖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출퇴근이 좀 멀긴 하지만 어차피 자율주행차로 다닐 것이기 때문에 운전에 대한 부담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양평 서종으로 이사를 한 것이다. 그곳에 처음 이사한 날, 멀리 북한강이 보이는 산자락에서 노을 지는 강변을 바라보며 산미가 강한 아르헨티나 산 체발 데스 안데스 와인을 마셨다. 데스 안데스. 죽음의 안데스를….      


죽음의 안데스. 죽음의 안데스. 머리가 아파왔다. 작은 기억의 편린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매우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유리파편처럼 기억의 상처들이 올라왔다. 달리는 자동차. 수도권 제2 외곽 순환을 달리던 자동차에 나는 타고 있었다. 갑작스레 올라간 속도계. 시속 200을 넘는 순간. 오른쪽 방향으로 날아오른 자동차. 그리고 그 안에서 자동차와 한 몸이 되어 하늘을 날고 있던 나. 멀리 지붕을 아래로 둔 전원주택과 그 뒤편에 끝없이 이어진 거꾸로 보이는 산. 유유히 흐르는 강물.      


피가 거꾸로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지럽혀진 그녀의 서재를 원래 있었던 데로 정리했다. 그녀의 책과 노트를 책꽂이에 정리했다. 문손잡이를 다시 고정하고 문을 닫았다. 제임스. 제임스는 누굴까. 도영을 만나야 한다. 도영이라면 내게 사실을 말해줄 것이다.      


저녁에 도영을 만났다. 두 달 만이다.      


“도영아, 너, 사실대로 말해주라.” 나는 그를 보자마자 곧바로 말했다.  

“… 뭘?” 도영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나, 요즘 꿈을 꾸고 있다고 얘기했지? 그런데, 그 일이 꿈이 아니었다는 느낌이 들어.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50년 6월부터 9월까지 기억이 나질 않아. 말해줘.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희수와 너,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

“…”      


도영의 얼굴이 검붉어지더니 잿빛이 되었다. 도영의 손이 떨렸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어서! 나, 희수가 점점 싫어지고 있어. 그 꿈을 꾸기 시작한 때부터. 이러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어. 가끔은, 희수를, 죽이는 상상을 해. 나도 모르겠어. 왜 그런지.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리고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제발 말해줘.”

“…”

“…”

“친구… 미안해. 으, 정말 미안해. 하지만 희수는 너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았어. 너와의 사이에서 꼭 아이를 갖기를 원했어. 너를 닮은 아이를.”

“그게 무슨 말이야? 더 자세히 말해봐!”

“…”     


도영과 헤어진 나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희수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도영의 말이 모두 사실인지, 알고 싶었다. 희수는 이미 집에 돌아와 있었다. 희수가 무심히 물었다. 어딜 갔다 오느냐고.     

 

“응, 도영이 만나고 왔어. 당신 사촌 오빠, 도영이. 왜, 도영이가 얘기하지 않았어?”

“무슨 말이야. 아무 말 못 들었는데. 왜 무슨 일이 있었어?” 희수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파리한 희수의 얼굴. 늘 무심한 듯 편안하게 보였던 희수의 얼굴에서 파리한 모습을 보다니.

“나, 도영에게 얘기 들었어. 요즘 내가 자주 꾸는 꿈 말이야. 그 일이 실제 내게 일어난 일이었다는 것, 알게 됐어.”

“오빠…, 아니, 당신…. 어떻게 해.”      


희수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아이보리 홈드레스 아래에 하얀 다리가 가냘프게 포개어져 있었다. 저 연약한 몸, 저 가냘픈 다리를 얼마나 애달파했었는지 모른다. 아이가 갖고 싶은 희수의 마음을 나도 알고 있었다. 나 또한 희수를 닮은 아이가 갖고 싶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나는 그냥 그때 죽었어야 했다. 아니, 복제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적어도 나는. 도대체 나는 누구인지….    

 

나는 그 길로 집을 나왔다. 자동차를 타고 서종 IC로 진입하여 수도권 제2외곽순환선을 달렸다. 양평 IC를 통과했다. 강상면을 지났다. 좌측으로 남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우측에는 양자산이, 좌측에는 개군산이 푸른 옷자락을 펼치고 있었다. 나는 뒷목을 더듬었다. 목과 머리가 만나는 지점, 이 지점에 내 이전 몸의 모든 기억이 살아있다. 이 기억의 칩을 빼고 싶었다.      


그런데, 이 기억의 칩을 빼면 희수를, 도영을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다시 예전처럼 살 수 있을까?      


Q-Bot이 강상면을 지나 금사면에 도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침묵.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약한 소음만이 들려왔다. 나는 눈을 감았다. 무언가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차 안 스피커에서 힌두 음악이 나오기 시작했다. 서서히 볼륨이 높아졌다.


432Hz, 영혼의 음악이 가슴 속 깊이 들어왔다.


<끝>



매거진의 이전글 푸른빛(2/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