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한한 경험 (만 원이 하늘로 날아갔다)
11월 날씨치고는 바람도 많이 불고 춥다. 오일장에서 생 땅콩 한 되를 사고, 알타리 무를 다듬어 파시는 아주머니 앞에 머물러 섰다. 늙은 호박은 깎고 썰어서 하얀 비닐봉지에 담겨있고, 밭에서 제멋대로 자랐는지 못생긴 당근이 흙이 묻은 채로 올망졸망 귀엽고 예쁘다. 가격이 꽤 오른 쪽파는 엎어놓은 바구니 위에 가지런히 누워있다. 모두 아주머니가 텃밭에서 길러낸 채소들이다.
남편 일을 돕느라 온전한 가정주부로만은 살지 못한다. 그래도 김치를 담가먹고 된장도 담그고 있다. 엄마가 되면 그냥 하는 일이라 생각하지만 늘 힘들고 버겁다. 그래서 요령이 생겼는데 알타리 무는 다듬어 놓은 것으로 사고, 쪽파도 손질해 놓은 것으로, 마늘도 깐 마늘을 사서 갈아 주는 곳에서 해결한다. 이것만으로도 훨씬 시간을 벌 수 있다.
깨끗이 다듬어져 있고, 예쁘게 생긴 알타리 무를 보는 순간 이미 머릿속에서는 김치를 담그고 있다. 얼른 들고 집으로 가서 알타리 무에 소금을 뿌려놓고, 어제 준비해 둔 마늘과 찹쌀 풀을 끓이면 후다닥 알타리김치 한 통을 채워 넣을 수 있단 생각에 마음이 바빠진다.
알타리 무 석단과 쪽파 값이 9천5백 원이다. 만 원짜리를 드리며 오백 원은 당근으로 달라고 하니 좋아하신다. 내 딴에는 오백 원을 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추워진 날씨에 누런 면장갑이 아닌 푸르뎅뎅한 나일론 장갑을 낀 채로 만 원을 엄지와 검지로 잡고, 구부정한 자세로 까만 비닐봉지를 벌려 알타리 무를 담는 순간, 만 원짜리를 놓쳤는지 날아가 버렸다.
담던 것을 멈추고 허리를 폈다. 처음에는 땅바닥에 떨어졌겠지 했는데, 세상에나 정말 깜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주위에 채소들 밑을 다 뒤지고, 주변에 담벼락 근처 모두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바람 따라 하늘로 올라갔다고 옆에서 고구마를 파시는 할머니 말씀에 동감은 할 수 없지만 온데간데 없어진 만 원짜리가 머리와 몸을 멍하게 만든다.
돈은 받았으니 채소를 담은 까만 비닐봉지를 가지고 가라고 하면서 비닐봉지 속을 두 번 다시 보신다. 찝찝한 마음에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산 것이니 들고 오는 발길이 왜 이리 편치 않은지, 횡단보도에 서서 5초 생각하고 아주머니께 발걸음을 돌렸다. 안 먹으면 그만이니 채소를 내려놓고 가겠다고 했다. 이 채소를 다시 파시라고. 아주머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집에 가면 채소는 많고 오늘 다 팔아 없애고 가야 한다며 한사코 거부하신다. 분명히 돈은 받았으니 마음 쓰지 말고 가라면서 등을 떠민다. 나중에는 돈을 찾았다고 거짓말까지 하신다.
알타리 김치를 해 먹어도 마음은 편치 않을 것이고, 무거운 검은색 비닐봉지를 들고 엉거주춤, 미치겠다. 어찌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바람이 부는 길가에서 30분은 흐른 듯하다. 괜히 김치 욕심을 냈나 싶어서 속상하기도 하고, 바람은 왜 이리 부는지 안경 속으로 찬바람이 들어가 눈이 시려서 그런지 눈물도 찔끔 난다. 다듬어 놓은 알타리 무를 가지고 가면 짐만 된다니 돈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지갑을 여니 천 원짜리 세장이 보인다. 그래 이거라도 드리자. 아주머니 잠바 주머니에 넣어드리니 왜 이러냐고, 이런 분 처음 봤다며 목소리를 높이신다. 옆에서 고구마 파시는 할머니까지 합세하여 그냥 가라고 싸움하듯이 야단이다. 옥신각신하며 삼천 원을 만지작 거리며 툴툴대는 아주머니, 나름 매듭짓고 걸어가는 뒤통수로 "저런 분 처음 봤어. 저런 분 처음 봤네."를 연거푸 하시는 아주머니 목소리가 들린다. 삼천 원으로 위로가 되셨을까 싶지만 마음은 정리됐다. 아쉬움이 있다면 만원과 삼천 원 사이에서 갈등을 했다는 거다. 천 원짜리가 두장 더 있었으면 좋았을 뻔했다.
참 별일도 있다. 만 원짜리가 어디로 갔을까? 분명히 손에 잡고 계셨는데 1초 사이에 휘리릭 날아갔다니 날아가는 모습이라도 보였어야 하는데 말이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희한한 경험이다. 다음 오일장에 찾아가 물어볼까 하다가 인연 만들지 말자 싶어서 "이런 일도 있구나" 하고 넘어간다.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이것뿐이겠는가. 만만치 않는 세상살이에.
2021년 11월 17일 수요일.
눈을 치켜뜨고 하늘을 자꾸 쳐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