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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별하숙생 Apr 17. 2023

퇴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인생

내 나이가 제법 많은건가 요즘 부쩍 의심하는 중이다. 미국이라는 곳이 그렇듯 사실 직장에서도, 아는 사람들에게서도 아무에게도 나이에 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없고 신경도 쓰지 않는데 유일하게 신경쓰는 사람은 바로 "나"다. 나이가 많은게 신경쓰인다기 보다는 직장생활을 20년 가까이 하다보니 이제는 조직속의 일원으로써 일하는게 가끔 불편하게 느껴지는걸 보니 나도 나이가 먹었고 또 다른 길로 접어들 때가 됐나 싶은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사실 지금 내가 근무하는 직장은 꽤 괜찮은 곳이다. 5년전에 입사할 당시 내세울거라고는 자신감과 튼튼한 몸뚱아리 밖에 없던 나였는데 미국회사에서 경험도 많지 않은데 비해 월급도 나쁘지 않았고 베네핏도 괜찮은 회사에서 근무하게 되었다고 무척 신나했던 나였다. 비관적으로 보면 금방 밑천이 드러나는 영어실력에, 전공은 일과 관련성이 적고 그나마 분야에서 근무한 경력이 인정되어 현 직장에서 그럭저럭 버티고 있다고 볼수 있고 긍정적으로 보자면 미국에 건너온 짧은 시간에 비해 의사소통능력도 괜찮고 전공과 업무관련성은 적지만 10여년 이상 동종업계에서 근무한 경력으로 깊이는 좀 떨어지지만 나름 넓고 얕은 지식들이 있어서 두루두루 멀티플레이가 가능한 사람으로 그럭저럭 커리어를 유지하고 있다. 처음 이 회사에서 근무하기 시작할때 한 5년정도 일해보고 더 근무할지 다른 곳으로 떠날지 생각해 보겠다고 막연하게 다짐했었는데 돌아오는 10월이 만 5년이 되는 시기인데 공교롭게도 그 막연한 다짐이 최근 좀 어처구니 없는 일을 겪으면서 현실이 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내가 근무하는 회사는 일본회사의 미국지사라 회계연도는 4월부터 다음 해 3월까지라 3,4월이 가장 바쁜 시기고 업무평가도 보통은 이 시기에 진행된다. 칭찬에는 인색한 일본인들이라 지금껏 그래 왔듯 크게 기대하진 않았지만 지난 해 결과가 그다지 나쁘진 않아서 크게 까일 일은 없겠다 싶었는데 결과는 역시 내 기대를 보기좋게 빗나갔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부분을 언급하는건 그렇다 치고 어떻게든 부족한 부분을 지나치게 확대하고 최대한 꼬투리를 잡아서 퍼포먼스를 축소시키려고 환장한 사람들 같았다. 잘 한 부분은 마치 그것이 상수인 양 가볍게 언급하고 지나갈 때는 잘 짜여진 시나리오에 나만 시놉시스를 모른 채 역할극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지경이었다. 어쨌든 내 입장에서는 부족했던 부분은 쿨하게 인정하고 좋은 결과를 도출했던 부분도 부각시키면서 견해차이를 좁히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내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매년 경신되는 매출 신기록 달성에도 불과하고 난 웃으면서 업무평가를 마칠 수 없었다. 그리고 업무평가 기록이 반영된 2023년 근로계약서를 받아보고 적잖이 실망을 했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물가상승률 정도는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지만 이건 아니다 싶어서 이의제기를 해서 다시 내가 해왔던 일을 얘기할 시간을 가졌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회사를 위해 자기 몸까지 갈아넣는 사람들에게 내가 버릇처럼 했던 말이 있는데 "내가 발전하면 회사가 발전하지만 회사가 발전한다고 내가 반드시 발전하지는 않는다". 회사는 매번 최고 매출액을 달성해서 좋을지 모르지만 구성원(들)은 행복하지 않는 아이러니, 멀리서 보면 희극같은데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아이러니가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며칠동안 매우 불편한 마음으로 일을 하다가 내가 정말 원하는게 뭔지 다시 생각해 봤는데 더럽고 치사해도 다녀야 하는지 돈보다 내 자존감과 만족감을 위해서 살아야 되는지 쉽게 결정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다시 생각해봐도 받아들일 수 없는 업무평가였고 스스로 동기부여를 하려고 노력해봐도 납득이 되질 않았고 더 큰 절망감과 실망만 느껴져 더이상 생각하길 그만두었다. 더이상 함께 할 이유가 없고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 회사에서 내가 있을 이유가 무엇인가. 천천히 회사와 이별을 준비할 시간이다. 인생은 이렇게 알 수 없어서 더 재미있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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