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지워진 사람, 남겨진 사람들

마음이 버틴 자리들 [11장]

by 이도화


"몇 번이고 짐을 싸고 또 풀던 나날들."

집을 떠났지만,
집은 한동안 내 안에 남아 있었다.
밤이면 문득 발소리 없는 불안이 따라왔고,
잠결에 숨을 크게 들이쉬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엄마에게 남은 것은
장사로 단련된 두 손뿐이었다.
그래서 어디든,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일하기 시작했다.


영등포 시장의 허름한 쪽방,
왕십리의 낯선 골목,
응봉동 산동네.


우리는 몇 번이고 짐을 싸고 또 풀었다.
가난한 사람의 짐은 가벼웠다.
버릴 것도, 남길 것도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몰래 아버지를 보러 갔다.


누군가에게서
어슴프레 들은 곳이었다.
버스를 내려
시장 끝자락,
사람들 발길이 한 번 더 꺾이는
모퉁이였다.


거기에는
엄마가 하던 것과 비슷한
숙녀복 가게가 있었고,
색이 바랜 옷들이
철제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가게 안쪽으로
커튼을 젖히고 들어가면
작은 방 하나가 나왔다.


아버지는
그 방 안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낮인데도
전등이 켜져 있었고,
시장 소음은
가느다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멀게만 느껴졌다.


방 안에는 술병이 가득했고
오래 마른 술 냄새가 공기에 남아 있었다.
온기라고는 남아 있지 않았다.


밥을 해 먹은 흔적도 없었고,
이불은 오래 펴지지 않은 채
구석에 밀려 있었다.
누군가 머물렀던 기척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를 본 아버지는
예전의 다정한 얼굴이 아니었다.
병색이 짙게 내려앉은 퀭한 얼굴로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내 손에 몇 장의 지폐를 쥐여주었다.


그것이 나와 아버지의 마지막이었다.


한 달쯤 지나 아버지의 부고가 전해졌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어디에도 없는 사람이 되었다.


철부지였던 동생들은 아무것도 몰랐고,
엄마도 나도 크게 울지 못했다.


새벽,
인기척에 잠에서 깼다.
엄마는
한 생이 통째로 무너지는 울음을
삼키고 또 삼키며
혼자 흐느끼고 있었다.


나는
그 곁으로 다가가지 못한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물을
조용히 삼켰다.


문뜩문뜩 몸서리치게 아빠가 그리운 순간들이 찾아왔다.


찾아도 찾아도
내 아버지는 없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야 나는 알게 되었다.
그 시절을 온몸으로 버텨낸 어린아이가 아직도 내 안에 있었다는 것을.


세상은 그 누구도 아이가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을 대신 지켜주지 않았다.


그날 이후 그 아이는 스스로를 지키는 법을 아주 천천히 배워 왔다.

✍️ 작가 노트

이 글은 어린 시절, 가장 어두웠던 시간을 뒤늦게 꺼내어 기록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어느 날, 삶에서 지워졌고,
남겨진 사람들은 울음보다 생존을 먼저 배워야 했습니다.


크게 슬퍼할 여유도 없이 각자의 방식으로
하루를 버텨야 했습니다.


그 시절의 엄마는 아이들의 상처를 보듬을
여유도, 능력도 없었지만
먹이고 재우는 일만큼은 끝내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묵묵함 덕분에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어린 나는 그 죽음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세상을 떠받치던 하나의 축대가 무너져 내린 듯한 감각만은
몸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 글은 상처를 미화하기 위한 기록이 아닙니다.
다만, 그 시간을 지나온 한 사람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붙잡고 있었던 것들을 조용히 남겨 두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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