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버틴 자리들 [13장]
외할머니 집에서 살기 시작한 뒤,
나는 말보다 종이를 먼저 찾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기에는
마음속에 쌓인 감정들이 너무 많았고,
어디로 흘려보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생각들은
가만히 붙잡아 두지 않으면
나를 더 흔들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연필을 쥐고
글씨를 베껴 쓰고,
아무 의미 없는 낙서를 반복하며
하루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시간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록이 아니라,
흔들리던 마음이
잠시라도 숨을 고를 수 있게 해 주는
나만의 방식이었다.
그렇게 나는
말 대신 종이를 곁에 두고
하루를 견디는 법을 익혀갔다.
시간은
조용히 흘렀고,
내 안의 혼란도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그해 봄,
사근동 언덕을 오르기만 하면
가장 먼저 나를 맞이한 것은
라일락 향이었다.
학교 담장 옆에
줄지어 서 있던 라일락나무는
화려한 모습보다
은은한 보랏빛 향을
먼저 내어주는 나무였다.
아침 햇빛이
잎사귀에 비스듬히 내려앉고
바람이 스치면,
그 향은 말없이 퍼져왔다.
그 순간만큼은
라일락이 내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오늘 하루는
괜찮을 거야.”
내가 다니던 사립 중학교는
크지 않았지만
규율이 엄격하고
학구열이 높은 학교였다.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단정해졌고,
조심성이 생겼다.
나는 그 분위기가 좋았다.
교실에 들어가면
우리는 성적순으로 앉았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 자리 배치는
마음속 어딘가에
조용한 경쟁을 심어놓았다.
나는 늘
교실 앞쪽,
네 번째 줄에 앉았다.
성적 상위 열 명에게
주어지는 자리였다.
중학교 내내
나는 그 자리를 지켰다.
왜 그렇게까지
애썼는지는
그때는 설명할 수 없었다.
돌아보면
성적 때문만은 아니었다.
집이 흔들리고
마음이 자주 가라앉던 시절,
그 자리는
내가 스스로 붙잡을 수 있는
작은 ‘질서’였다.
그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조금은 괜찮은 아이가 된 것 같았고,
앞날이
아주 조금은
열려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영어 시간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주 단위로
회화를 통째로 외워 와야 했는데,
나는 본문을
작은 공책에 옮겨 적고
단어를 하나씩 해석하며
마치 내 일기처럼
붙들었다.
내가 만든 문장은 아니었지만,
어떤 문구들은
이상하게도
내 속마음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낯선 언어 속에서
나는
조용한 위안을 찾았다.
선생님들은
나를 예쁘게 봐주셨다.
목소리는 작고,
눈으로 먼저 대답하는 아이.
수업 뒤에
칠판을 어설프게 지우고
뒷정리를 돕던 아이.
혼자인 것 같았던 시절,
‘나를 바라봐주는 어른이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큰 힘이 되었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예민했다.
어떤 날은
친구들의 웃음이
따뜻하게 들렸고,
또 어떤 날은
유리창 너머의 소리처럼
멀게만 들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만 보아도
내 안이
같이 흔들릴 때가 있었고,
누군가의
무심한 한마디에도
마음 한쪽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겉으로는
누구보다 잘 웃었지만,
속에서는
이유도 모르는 울음이
자꾸 차올랐다.
들키고 싶지 않아서
나는 점점
조용해졌고,
누구보다
부지런해졌다.
그 무렵 나는
아무도 모르게
책 끝이나
노트 한 귀퉁이에
내 마음을
몰래 적어 두기 시작했다.
말은
목구멍에서
자꾸 걸렸지만,
글은
이상할 만큼
쉽게 흘러나왔다.
억울함과
두려움,
부끄러움,
자존심과 분노가
글자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그래서 나는
노트를 숨기는
습관이 생겼다.
내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사근동 운동장이 내려다보이는
도서실 창가 자리.
나는 조용히
노트를 펼쳤다.
그 노트의 장마다
내 마음이
눌어붙어 있었다.
“라일락 향 때문에 아침이 괜찮았다.”
“아무도 모르지만 오늘은 조금 힘들었다.”
“왜 이렇게 가난하고 보잘것없을까.”
“그냥 내버려 두지, 제발.”
“선생님이 내 이름 부르는 소리가 좋았다.”
“단단해지자. 이것도 곧 지나가겠지.”
그 글들은
고백처럼 순했고,
아이처럼 솔직했다.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문장이었지만,
나는
그 문장들 덕분에
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학교가 끝나고
사근동 언덕을 내려갈 때,
가방 속에
노트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가라앉곤 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 노트는
내가 처음으로 만든
‘안전한 공간’이었다.
누구도
건드릴 수 없고,
오직 나만 드나들 수 있는 곳.
그곳에서
나는 마음을
잃지 않는 법을 배워갔다.
그리고
아주 어린 마음으로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언젠가
그 글들이
나를
구하리라는 것을.
이 글은 중학생이 되던 시절,
말로 설명할 수 없던 감정들을
처음으로 글로 붙잡기 시작한 시간에 대한 기록입니다.
집 안의 혼란과
사춘기 문턱에서 흔들리던 마음은
누군가에게 털어놓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 대신 종이를 선택했습니다.
노트에 적힌 문장들은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라,
스스로 무너지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쌓아 올린 마음의 피난처였습니다.
그 시절의 기록은
완성된 글도, 잘 쓰인 문장도 아니었지만
그 안에는
당시의 제가 하루하루를 견뎌내고자 했던 시간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돌아보면
그 작은 노트는
제가 처음으로 만든 ‘안전한 공간’이었고,
지금까지도 삶을 지탱해 온
가장 조용하고 단단한 뿌리였습니다.
이 글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마음을 지켜냈던
누군가의 시간을
다시 한번 존중하게 만드는
작은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