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로 글 쓰는 소설가

이토록 고고한 역사 소설가 김탁환

by 아혜

징징대고 싶은 날이 있다. 이래저래 스트레스가 쌓여 머릿속이 먹구름으로 가득할 때, ‘나는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지?’ ‘난 왜 이 모양인 거야?’ ‘왜 나만 힘들게 사는 것 같지?’ ‘왜 나만...’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지?’

어찌 보면 다른 사람에게 그 어떤 해답도 얻을 수 없는 일들이 마음을 답답하게 할 때가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럴 때일수록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 왜일까?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서? 어디 한 번 생각해봐야겠다. 내 징징댐을 받아 줄 누군가가 있을까?


있다! 평소 믿고 따르는 선배 한 명이 있다. 내가 힘들 때 허심탄회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 나의 흥분을 진득하게 가라앉혀주는 사람이다. 사실 선배는 내 징징댐을 마주했을 때마다 나에게 특별한 이야기를 해주진 않는다. 묵묵히 내 말을 들어주다가 적당히 호응해주고, 공감의 몇 마디를 건네는 게 전부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그렇게 한 30분가량을 투덜대고 나면 어느새 내 마음은 언제 그랬냐는 듯 미묘한 뚫림의 현상을 맞본다. 맞다. 나는 선배에게 그 어떤 해답을 바란 게 아니었다. 그 순간 내 말에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 내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 그리고 호응의 몇 마디를 건네주는 것, 그거면 충분했다.


내가 만약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면 바로 이 사람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나는 김탁환 작가의 신작, ‘이토록 고고한 연예’ 속에서 ‘달문’과 마주했다. 연암 박지원의 광문자전에 기록된 조선시대 실존인물, 1707년에 태어나 청계천의 거지로 평생을 살면 오롯이 ‘거리’에서 사람들과 만났던 달문은 가난했지만 아름다운 품성을 가진 고귀한 사람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역사소설의 거장 김탁환 작가는 ‘달문’이란 인물이 너무 ‘큰 사람’이었기에 소설로 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수년을 마음속에 품고 살았다고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2014년 4월 23일 세월호 참사가 있던 해였다. 김탁환 작가는 당시의 참혹한 현실 앞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되뇌었다.

‘사회적 이야기를 소설책에 담아 문제를 전면으로 드러나게 해야 한다.’

김탁환 작가는 진도 팽목항으로 향했다. 그는 울분의 역사 한가운데에서 슬픔만으로 가득 찬 사람들과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그의 눈은 한 사람에게 멈췄다. 처음엔 무심코 지나쳤다. ‘저분은 어떤 아이의 부모님일까?’ 그렇게 몇 달이 흐른 어느 날, 김탁환 작가는 그에게 말을 건넸다.

“당신은 누구의 부모님인가요?”

“아닙니다. 저는 단지 세월호 소식을 듣고 너무 마음이 아파 직장까지 접어두고 달려왔을 뿐입니다.”

예상 밖의 그의 대답에 김탁환 작가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머리에 스친 한 사람, 바로 ‘달문’이었다.

‘내 인생에 한없이 <좋은 사람>을 써야 한다면 바로 지금이다.’

그렇게 그는 마음 한편에 고이 보관해두었던 ‘달문’을 꺼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달문은 평생을 거리에서 살며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그 곁을 지킨 사람이다. 나를 먼저 생각하고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라면 달문은 그 반대였다. 다른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며 살았던 달문. 어쩌면 그는 조선시대 최고의 이단아이지 않았을까? 김탁환 작가는 달문에게 세 가지의 반전 매력이 있다고 했다. 하나, 달문은 조선에서 가장 가난한 거지 왕초였지만 가장 기부를 많이 한 사람이었다.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빈부의 기준은 무엇일까? 둘, 달문은 조선 최고의 추남이었지만 조선에서 가장 아름다운 춤을 췄던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가 춤의 경지에 올랐을 때 선택했던 것은 절름발이 춤(철괴무)이었다. 과연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미(美)의 기준은 무엇일까? 셋, 달문은 일자무식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달문을 찾아와 너 나할 것 없이 고민을 털어놓는 일이 다반사였다. 과연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삶의 지혜는 무엇일까?


김탁환 작가의 말이 귀에 맴돈다.

“소설은 눈과 발(품)로 쓰는 것이라 믿고 살아왔다. 그런데 어는 순간 깨달았다. 소설은 <귀>로 쓰는 것이라는 것을!”

평생을 거리에서 삶의 고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의 희로애락을 함께 했던 달문의 삶, 수년 동안 거리로 나가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글로 담아내는 소설가 김탁환의 삶. 나는 그들의 삶이 많이 닮아 있음을 느낀다.


띵동! 본방송 시간이 끝나자마자 문자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김탁환 작가였다.

‘방송을 보면서 덕분에 이토록 고고한 연예를 구상하고 창작한 나날을 다시 그려봤습니다. 가을에 소주 한 잔 합시다 10월의 어느 날 즈음에’

오늘도 일정 분량의 글을 쓰며 스스로가 소설가임을 게을리하지 않는 그의 모습이 그려진다. 10월의 어느 날 즈음에 마주할 김탁환 작가와의 소주 한 잔이 간절히 기다려지는 하루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에게 징징대고 있는 내 모습도 상상해본다. 나의 징징댐을 받아줄 것 같은 사람이 한 명 더 생긴 이 순간!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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