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의 인터뷰 저널리스트 지승호
마음을 움직이는 인터뷰 특강』
지승호 지음 | 오픈하우스 | 2016년 04월
고지식은 질병이다. 나의 경우엔 분명히 그렇다. 사람의 뇌에는 문신처럼 뭔가가 새겨지는 영역이 따로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적힌 문장들은 무슨 수를 써도 지울 방법이 없다. 나는 어릴 때부터 그랬다. 잊을 수 없는 상처들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날이 너무 많았다. 고민 끝에 나는 나름대로 신통한 방법을 하나 찾았다. ‘어차피 내가 지울 수 없는 것들이라면 내가
다 새기자. 내가 적은 것들로 기억의 벽을 모두 채우면 아픔이 새겨질 자리가 없겠지!’ 이 방법은 꽤 쓸 만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그러고 있다. ‘PD는 사람을 아껴야 한다!’ 학교를 졸업하고 방송국에 입사하면서 내가 머릿속에 스스로 적었던 문장이다.
그렇다면 언행일치! 그게 되냐고? 그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게 된다면 인생 애쓰며 살 필요가 있을까? 언행일치는 지향이며 그래서 과정이지, 결코 손에 움켜쥘 수 있는 결과가 아니다.
오늘도 여전히 내 뜻과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과 사람들 속에서 나는 수없이 절망하고 좌절하기를 반복한다. 무엇보다 PD라는 나의 정체성과 소신 그리고 고민과 선택이 존중받지 못하는 상황에 빠질 때면 그 상처가 아물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 상처의 중심에는 매번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인생이란 게 참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어찌어찌 힘든 상황 속에서 나를 정신 차리게 하는 것 또한 ‘사람’이다. 사람에 상처 받고 사람에 위로받는 삶. 이게 바로 인생인 걸까? 스친 인연들이라 생각했던 사람, 수년을 함께해 온 사람, 그들이 건네는 진심 어린 위로와 응원에 나는 힘을 얻었다. 그리고 그 힘의 중심에는 반드시 ‘사람’이 있었다.
‘전업 인터뷰어’란 희한한 직업을 가진 사람을 만났다. 그 직업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봤다. 사람을 아끼지 않으면 절대 시작도 할 수 없는 일, 한 사람과의 대담집을 내기 위해 수개월의 준비과정을 거치고 수백 개의 질문을 던져야 하는 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하는 일, 결국 ‘사람을 아낄 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 내가 만난 사람은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다.
나는 책으로 방송 프로그램 만드는 일을 하는 프로듀서다. 어쩌면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그의 일과 많이 닮아있지 않을까? 나는 프로그램 한 편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어두컴컴한 밀폐 공간에서 화면 속의 저자와 온전히 마주한다. 저자의 사소한 말투부터 깊이 있는 이야기까지 보고 듣고, 또 보고 듣는 것을 반복한다. 그리고 생각하다 또 이내 영상을 붙이고 자르기를 수없이 반복하다 보면 한 편의 대담 프로그램을 완성되어 있다. 이 일 또한 ‘사람을 아낄 줄 알아야’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나는 제대로 된 프로듀서인가?’ 나는 지승호라는 사람을 만난 후 내 머릿속에 또 하나의 문장을 새겨 넣었다.
18년 동안 52권의 책을 낸 지승호 작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져왔던 그가 내 스튜디오에 앉아서는 이제 대답을 해야 한다. 이런 설정 자체가 나로선 매우 흥미진진했다.
그런데 말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로 소문난 지승호 작가도 사람에 대한 상처가 많아 보였다. 신해철, 김어준, 강신주, 유시민, 장하준, 김수행, 우석훈, 서민 그리고 김의성, 정유정까지 국내의 저명한 인사들과 대담집을 낸 ‘국내 유일의 전문 인터뷰어’ 이런 화려한 수식어 뒤에 사람에 대한 상처가 숨어 있었다니.
<TV책방 북소리>와 같은 정통 대담 프로그램에서는 주인공 자리에 앉은 출연자는 쉽게 화중 진담에 빠지고 만다. 자기 자신을 아무리 잘 감추는 사람이라도 대담 속의 어느 찰나의 순간에는 진심을 비추게 된다. 내가 오랜 시간 편집실에 갇혀있는 것도 바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그는 무심한 듯 강해 보였지만 그의 이야기 속엔 사람에 대한 상처가 담겨 있었다. 특히 같은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는 더 크다며 지독한 서운함을 드러냈다.
지승호 작가의 신간 <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서문에는 그의 착잡한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다. “몇 년 전에 저에 대한 이런 댓글을 봤습니다. ‘부르는 대로 받아 적으면서 본인 이름 붙이자면 상당히 쪽팔릴 텐데. 15년을 하는 거 보니 낯이 두껍군’이라는 문장이었죠.” 자신이 반평생을 가까이하고 있는 일에 대한 정체성을 흔드는 이런 댓글을 보면서 그의 마음을 어땠을까? 굳이 책의 서문에 왜 이런 악플을 적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물었다.
“이런 악플을 볼 때마다 무릎이 꺾이는 기분이 들어요.”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그의 표정에서 어떤 초월의 기운 비슷한 것이 느껴졌다.
“<인터뷰어>라는 건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시지푸스와 같아요. 시지푸스는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고 바위가 산 아래로 다시 떨어지면 다시 올리기를 반복하는 형벌을 받은 그리스신화의 한 인물입니다. 인터뷰어도 마찬가지로 인터뷰할 대상이 바뀔 때마다 산 아래서 바위를 산 위로 다시 굴려 올리는 일을 반복해야 하니까요. 그 과정 속에서 중요한 것이 사람에 대한 관심이고 끊임없이 질문의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인 것이지요. 이 과정 속에서 저는 스스로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 나 자신을 먼저 아끼기 위해 애씁니다. 그래야 진정성을 갖고 상대를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그가 “나 자신을 먼저 아끼기 위해”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거기에 꽂혔다. ‘나는 과연 얼마나 나 자신을 아끼면서 살아가고 있을까?’ PD는 프로그램을 위해 수많은 사람에 치이며 때론 자존심까지 내려놓는 일이 비일비재한 직업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프로그램을 위해 그 어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내가 먼저 참고 견디면, 내가 먼저 배려하고 이해하면, 나는 진정한 PD, 사람을 아끼는 PD가 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것은 큰 오해였다. 나의 고지식함은 확실히 질병이었다. ‘착한 사람 증후군’에 걸려 스스로를 극심한 과로와 스트레스, 강박과 불안으로 내몰고 있는 내 모습을 떠올렸다. 지승호라는 사람을 만난 그날 나는 내 머릿속 문신을 다시 새겼다.
“나는 얼마나 나 자신을 아끼며 살아가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