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불행하지 않은 작가, 김보통

by 아혜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

김보통 지음 | 문학동네 |2017년 08월


“김보통”

2009년 입사

2013년 퇴사

2013년 만화가 전업

2015년 수필가 겸업

2017년 아직 불행하지 않음


책에 실린 저자 프로필이다. 이토록 간결하고도 완벽한 자기소개라니! ‘아직 불행하지 않음’이라는 문장은 묘했다. 불행 따윈 안중에 없다는 듯, 그 어처구니없을 만큼 무심한 태도에서 나는 모종의 무게감을 느꼈다. ‘불행’ 앞에 붙은 ‘아직’이라니! 그 한마디 부사 속에는 정말 수많은 말들이 잠겨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풀어 ‘올 테면 와 바. 상대해 줄게(혹은 무시해줄게)’ 정도로 읽기로 했다.


‘김보통’이라는 사람이 나는 궁금했다. 우선은 그의 얼굴부터 궁금했다. 그는 얼굴 공개를 거부하는 작가로도 유명하다. 자신의 만화 캐릭터인 ‘고독이’ 탈을 쓰고 나오거나, 가면을 활용해 얼굴을 교묘하게 감췄다. ‘그래도 설마 TV 대담 프로그램에 얼굴을 가리고 나온다고 하겠어?’ 역시 설마는 늘 사람을 잡는다. ‘고독이 캐릭터 탈을 쓰고 출연하게 해 주면 나가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프로그램 제작진 범위를 넘어 회사 차원의 고민이 시작됐다.


‘그래? 새롭네. 재밌겠는데?’

팀장님을 넘어 부장, 국장님까지 너무 쉽게 OK를 불러준다. 그 덕분에 김보통, 아니 고독이의 출연이 확정됐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듣고 오히려 놀란 쪽은 김보통 작가다. 지금까지 탈을 쓰고 출연하는 조건을 수락한 TV 프로그램이 없었단다. 하긴 담당 PD인 나도 놀랐으니. 아무튼 그렇게 해서 나는 김보통 작가의 실물을 보게 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 무렵 나에겐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당시 아파트 13층에 살고 있었는데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서면 난간 너머를 내려다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이쯤에서 떨어지면 한 방에 죽겠는데’ 처음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는 ‘많이 피곤한가 보다’ 의식적으로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으려 했다. 마치 죽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어느 날 회사 동기에게 지나가듯 그런 얘길 하니 웃으며 대꾸했다 ‘나돈데’ 그 말에 나도 웃었다. 나만 힘든 것이 아니었구나 싶은 안도감에, 그리고 늘 죽음을 떠올리며, 때로는 바라며 삶을 견뎌내는 우리가 우스워서 웃었다.”

<나는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 中 p45>


오늘 아침, 출근하기 위해 눈을 뜬 당신의 한번 표정을 떠올려보자.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짜증이 난다는 직장인들이 요즘 많아졌다. 심지어 욕을 내뱉으며 일어난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김보통의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는 바로 이런 우리들의 초상을 돌아보게 만든다. 스스로를 착취하며 과로를 일상화시킨 사회. 그러다 결국 ‘불행’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진 삶! 지금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김보통 작가는 말한다.

“‘모두 다 나만큼은 불행할 거야!’라는, 어리석은 생각이 들 때가 나 스스로를 마주할 가장 적절한 시기입니다. 당신은 불행하지 않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녹화를 시작하자 그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나는 그의 말을 속으로 따라 했다. ‘불행하지 않을 가치…’


그가 처음 대기업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넌 곧 불행해질 거야!’

그런 말을 들으며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보다 더 불행해질 수는 없어!’

지금보다 더 불행해질 수는 없겠다는 판단. 바로 그것이 그가 퇴사를 결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고 한다.


그는 계속 인터뷰를 이어갔다. 이날 녹화에서 김보통 작가가 들려준 이야기의 요지는 이렇다.

‘나는 퇴사 후 무모할 정도로 솔직하게 자신을 되돌아봤다. 자신의 깜냥을 찾기 위해 애씀의 시간을 보냈다. 식비 걱정을 하며 곰팡이 핀 식빵을 뜯어먹기도 하고, 작은 도서관을 만들겠다며 퇴직금을 털어 수백 권의 책들을 사들이기도 했다. 남들이 보면 혀를 찰 일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나는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 진지하게 묻고 답을 찾길 수없이 반복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17년 만에 그림을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2018년 오늘도 그는 만화가로서, 수필가로서 ‘인생의 행복’을 그리고 기록한다. 자신의 표현처럼 그는 ‘타고난 책임감과 적절한 오지랖’으로, 재능기부부터 개인 작업실 운영까지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자신은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차근차근 길을 찾고 있을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녹화 막바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를 잠시 동안 넋을 놓게 만들었다.


“만약 지금 당신이 불행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절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행복은 보통 사람이 가져야 할 당연한 권리니까요.”


‘박 PD!’ 내 디렉팅을 기다리다 못한 기술 감독의 호출에 번뜩 정신을 차린다. 녹화를 끝내는 컷 소리와 함께 그는 후련하다는 듯 고독이 탈을 훌떡 벗었다. 그 모습은 마치 행위예술가의 퍼포먼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고독하고 무거웠던 인생의 짐. 그것을 한 번 더 덜어내는 상징적인 행위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땀범벅이 된 그는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의 행복한 미소를 보며 ‘보통 사람의 얼굴’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가슴엔 이런 문장이 자막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행복하라! 보통사람만큼!’


며칠 전 나는 그에게 안부 문자를 보냈다. 그러자 곧 이런 회신이 왔다.

“다행히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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