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의 동행

문학평론가 염무웅 선생

by 아혜

『문학과의 동행, 염무웅 대담집』

염무웅 지음 | 한티재 | 2018년 04월


2018년 3월, 나의 외할머니는 하늘로 소풍을 떠났다.

외할머니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그녀의 일상은 새벽기도로 시작해 성경 낭독 그리고 찬송가로 마무리하는 것으로 채워졌다. 내가 초등학교를 갓 입학했을 즈음이었다. 외가에 놀러 갔다가 그녀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갔다. '찬송가 126장 부르겠습니다'라는 인도자의 말에 그녀는 갑자기 당황했다. '내 것을 가져왔어야 했는데, 깜빡했어….' 나는 얼른 내 찬송가의 그 페이지를 펼쳐 앞에 내밀었다. 그제야 그녀는 안심한 듯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외할머니는 숫자를 읽지 못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외할머니는 문맹이 아니었다. 한글은 물론이고 한자까지 잘 읽고 쓰시는 분이었다.

얼마 후 나는 엄마로부터 그 까닭을 들을 수 있었다. 외할머니는 1922년에 태어났다. 그녀는 부유한 집 첫째 딸로 부족함 없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여성에게 교육이 쉽게 허락되지 않았던 시절이었지만 그녀는 달랐다. 외할머니는 그 시대가 정해 놓은 부당한 환경에 굴복하지 않았다. 아마도 아버지가 깨어 있는 분이었기에 그 덕도 크지 않았을까 싶다. 그녀는 서당에 다녔다. 머슴이 업어다 서당에 데려다주고 수업이 끝나면 다시 업고 집으로 왔다고 했다.


그런데 당시 서당에서 '한자 수업'만큼 '숫자'를 읽고 듣고 쓰는 것에 대해서는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였구나! 외할머니의 찬송가 페이지 표기가 한자로 돼 있었던 이유를 나는 그 일로 알 수 있었다.

그 일이 손녀 앞에서 그렇게 부끄러우셨을까? 그날 이후 외할머니는 숫자를 익히시려 부단히 애쓰셨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부끄러우셨을지 몰라도 그런 외할머니가 나는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나의 외할머니는 내가 평생토록 지켜가야 할 삶의 태도를 그렇게 가르쳐 주셨다. 사람이 가장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부족함이 아니라 바로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라는, 내 오랜 생각 역시 외할머니의 이런 모습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당시 외할머니의 연세는 이미 일흔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여전히 부끄러움을 아셨고, 그래서 부단히 노력하셨다. 나는 돌아가시고 난 이후에야 겨우 외할머니의 나이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는 그저 나이가 많은 분이 아니라 언제나 가장 든든한 '참 어른'으로서 내 곁에 있어 주셨다. 그런데 이제 그녀가 세상에서 사라졌다.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했는데 그녀는 저 멀리 소풍을 떠났다. 상실감은 한동안 이어졌다.


그렇게 두 달쯤 지났을 때, 나는 우연히 한 권의 책을 통해 또 한 분의 '어른'을 만날 수 있었다. <문학과의 동행, 염무웅 대담집>이었다. '문학, 시대적 가혹함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삶의 방식, 염무웅 선생이 육성으로 들려주는 현대사와 문학 이야기'라고 적힌 소개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외할머니를 떠올렸다.ᅠ

정독했다. 그리고 나는 책의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내 프로그램 <TV책방 북소리>로의 출연 섭외 연락을 드렸다. 하지만 기대했던 출연이 곧바로 이루어지진 못했다. 출연은 긍정적이나 당장은 건강상의 이유로 병원 치료부터 받아야 한다고 하셨다.


'회복하실 때까지 저희는 무조건 기다리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 달 후 문학평론가 염무웅 선생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ᅠ책방 북소리>를 연출하면서 나는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인기 저술가들을 많이도 만난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대가일수록 겸손하고 사람을 존중해 준다는 점이다. 염무웅 선생도 바로 그런 분이었다. 그는 녹화 내내 손자뻘의 제작진에게 지극한 예와 존중으로서 대해 주셨다. 실로 '참 어른'의 모습이었다. 절로 존경심이 느껴졌다.ᅠ


그는 1941년에 태어나 시대적 역경 속에서 문학의 길을 걸어온 원로 문학평론가다. 1964년 <최인훈 론>으로 등단해 식민지 시대 문학을 재조명하고 '실천하는 문학'의 최전선에 앞장섰다. 대학 입학과 함께 마주한 4.19 혁명, 자유와 사유의 기준점이 된 5.16 군사정변 등 그는 시대적 참혹함을 마주할 때마다 피하지 않았다. 그는 김승옥, 최인훈, 박태순, 김현, 김치수, 이청준, 김수영, 신동엽, 신경림 등 동시대의 동료 문인들과 민주화운동 대열에 섰다. 그는 이것이 문학평론가로서 자부심으로 살아올 수 있었던 근원이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ᅠ

그는 1960년 4.19 혁명 당시를 무게 있게 회고했다. 4.19 혁명 이후 사회적 구조가 후퇴하고 변질되는 결과를 초래했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는 한국 현대사에서 솥뚜껑이 열리며 학문의 르네상스가 폭발할 수 있었던 역사적 사건이라 했다. 4.19 혁명을 기점으로 문학작품 활동에 큰 변화가 있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최인훈의 <광장>을 꼽았다. 한 청년의 성장 과정을 다루며 남과 북의 현실을 균형감 있게 다루는 것은 4.19 혁명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작품 활동이라고 의미를 설명했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그에게 빠져든다. 녹화를 이어가는 긴 시간 동안 우리는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마치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에 혼이 빠진 어린아이들처럼 집중하고 있었다. 결코 짧지 않은 대담 시간 내내 그는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1950년대를 시작으로 2018년의 오늘을 이어온 역사적인 순간을 차근차근 짚어주었다.

대의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는 그는 요즘도 나빠진 눈을 비비며 책을 읽고 곁에 둔다고 했다. 매 순간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며 살고 있다는 염무웅 선생.

그날의 만남은 외할머니를 하늘로 보내드린 후 지독한 상실감에 빠져 있던 나에게 지극한 위로가 됐다. 방송 이후 염무웅 선생님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인생과 생각을 듣고 난 후라 선생님이 훨씬 더 멋있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말이 아니라 자신의 삶 그 자체로서 가르침이 되는 분. 그런 존재가 바로 '진짜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뵙는 내내 '할아버지라고 부르면 안 돼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데 겨우 참았다. 그날 집에 돌아와서 시를 한 편 썼다.ᅠ


어른을 만났다ᅠ


거짓 어른이 득실대는 세상,ᅠ

참으로 애석한 '나'다.ᅠ


참 어른을 찾을 수 없는 세상,ᅠ

거짓에 상처 받는 '너'다.ᅠ


참과 거짓,ᅠ

거짓과 참,ᅠ

혼란 속에 살고 있는 '우리'ᅠ


그런데 오늘,ᅠ

거짓말처럼 참 어른을 만났다.ᅠ


참 벅찬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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