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끄라비
“쿵!”
지태가 들고 있던 노트북을 떨어뜨렸다. 순간 화가 났다. ‘노트북이 충격에 얼마나 약한데 조심성이 그렇게 없나?’ 곧이어 머릿속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네가 들지 그랬냐. 지태가 너보다 들고 있는 짐이 많으니까 그렇지. 노트북이 지태보다 중요하냐?’ 이 말이 맞다. 내가 노트북을 챙겨도 됐을 일이다. 나를 배려해 무거운 짐을 들어주는 그에게 고마워하지 못할망정 화가 나다니. 나는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내가 노트북 챙길게. 너 손에 짐 많은 거 생각 못 했다. 미안.”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많이 발전했다. 나는 원래 사람의 마음보다 일의 결과가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런 내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버린 사건이 있다. 끄라비에 오고 싶었던 두 번째 이유다.
전 세계에서 오직 끄라비에서만 할 수 있는 체험이 있다. 바로 ‘야광 플랑크톤 스노클링’이다. 살면서 처음 들어본 이 생물은 지구 드문 곳, 캄캄한 밤바다에서만 볼 수 있다. 평소엔 보이지 않지만 밤바다에 들어가 팔을 휘젓는 순간, 내 몸에 부딪힌 플랑크톤이 야광처럼 빛을 낸다. 그게 보고 싶어서 온종일 뱃멀미를 참고 기다렸다. 언제쯤 시작하려나. 지루해서 하품이 나오는데 갑자기 선체에 불이 꺼졌다. 맙소사. 지금 하는 거야? 말도 없이?
“지태야 빨리 스노클 마스크 껴. 우리도 나가자.”
마음이 조급해진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잠시 후 야광 스노클링이 끝나니 원하는 사람은 지금 입수하라.”라는 방송이 계속해서 나왔다. 나는 준비가 끝났는데 지태는 아직 마스크를 끼지도 못했다. 지태를 기다리다가 온종일 기다린 야광 플랑크톤을 놓칠까 봐 초조했다. 그 순간만큼은 플랑크톤이 지태보다 중요했다. 평생 다시없을지도 모르는 기회라고 생각하니 더 불안했다. 마스크 끼는 게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인가? 짜증을 참지 못한 나는 결국 지태를 뒤로하고 캄캄한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우와. 진짜 너무 예쁘다. 근데 지태는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같이 보고 싶은데.’
바다에 들어가자마자 그를 찾으러 다시 배 위로 뛰어 올라왔다.
“삐이이이 이익!”
스노클링 시간이 1분 남았다는 말과 함께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있는 그를 발견했다. 화가 난 표정이었다.
“너는 왜 단 한 번도 나를 기다려주지 않아?”
지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스크 고무줄이 빠져서 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시력이 좋지 않다. 안경이 없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눈이 나쁘다. 거기에 선체의 불도 꺼져서 눈뜬장님이었을 것이다. 내가 옆에 있었다면, 내가 도와줬다면 함께 야광 플랑크톤을 볼 수 있었을까? 적어도 그의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태는 언제나 내 손을 잡고 걸었다. 내가 시장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려도, 걸음이 느려서 뒤처져도 그에게는 단 한 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나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우리의 발걸음이 멀어지기 전에 그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기다렸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뒤에서 잘 따라오고 있는지 단 한 번도 신경 쓴 적이 없다. 그동안 그의 배려로 함께 걸었던 것이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는 나를 탓하지 않았다. 설령 내가 부족해서 생긴 일이라도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했다. 발리에서 오토바이를 타다가 내가 넘어졌을 때도 그랬다. 내 운전 실력이 미숙하다고 화내지 않았다. 길이 울퉁불퉁해서 그렇다고 길을 탓했다. 나는 어땠는가. 발리에서 그가 운전하는 오토바이 뒷좌석에 탄 적이 있다. 그는 내비게이션을 보지 않고 자기의 감을 따라 숙소를 찾아갔다. 한 번, 두 번, 세 번. 길을 세 번이나 잘못 들었을 때 나는 폭발했다. 그냥 드라이브한다고 생각하면 되지 일찍 도착하는 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화를 냈을까.
세계여행을 가기 위해 그가 회사를 관뒀을 때가 생각난다. 회사는 온갖 핑계를 대면서 월급을 주지 않았다. 그는 점잖은 말로 몇 개월을 기다렸다. 나는 따지지 못하는 그가 답답했다.
“노동부에 당장 회사를 신고해! 이건 네가 물러 터져서 그런 거야. 다 네 잘못이야!”
“회사에서 월급 안 주는 게 왜 내 잘못이야? 회사 잘못이지. 너는 나를 몰아세울 게 아니라 위로를 해줘야지. 너만큼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못 받은 돈에 가려 그의 마음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지태도 돈을 받지 못해서 힘들었을 텐데 전혀 헤아리지 못했다. 야광 플랑크톤에 눈이 멀어 시력이 안 좋은 그를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그 또한 온종일 야광 플랑크톤을 보고 싶어 했다. 언제 시작할지 기대하며 기다렸었다.
여행하면서 종종 마음의 민낯을 마주한다.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한국이었다면 절대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나 사람을 몰아세웠는지, 실수에 엄격하고 사소한 틀어짐에도 화를 참지 못했는지 말이다.
“세계여행을 떠나 보니 정말 인생이 변했나요?”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글쎄요.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 같아요.”라고 대답할 것 같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히 변했다고 자신하는 것이 있다. 바로 ‘당신이 더 중요한 마음’이다. 이제는 일의 결과보다 내 사람의 마음을 먼저 살핀다. 지태가 가장 중요하다. 그 외의 것은 언제라도 다시 가질 수 있으니까.
에세이 <어차피 오늘이 그리워진다> 본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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